[앙코르 내 인생] 해운회사 임원에서 골프 레슨프로가 된 이광희(68)씨

나는 경력 10년차 골프 레슨프로다. 지난 2002년 환갑이 다 된 나이에 미국협회인 PGTCA(Professional Golf Teachers & Coaches of America)에서 레슨프로 자격증을 땄다. 이후 현장에서 골프 지도자로 활동했다.

나는 1999년 직장에서 은퇴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은 퇴직이었다. 27년간 근무한 조양상선에서 영업이사를 지내고 1993년 퇴직한 뒤 스위스계의 한 해운회사에 전무로 근무할 때였다. 한국 직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이 잦았던 때문인지 명색이 임원인데 IMF 외환위기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갑작스레 짐을 싸야 했다. 당혹스러웠다. 그즈음 두 사람의 노후를 대비하여 식당을 시작한 아내에게는 지금도 미안하다.

다시 일할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퇴직 후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그해 연말 나는 한 골프 전문 케이블TV 방송사에서 주최한 아마추어 골프대회에 참가했다. 결과는 생각지도 못한 우승이었다. 골프와의 인연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최고령자에다 기업 임원 출신이라는 경력이 눈에 띄었는지 골프 칼럼 연재 제의를 받았다. 과연 내가 쓸 수 있을까 망설여졌지만 평생 골프와 관련된 기사·서적을 탐독하면서 꾸준히 스크랩을 해온 것이 큰 자산이 됐다. 내가 좋아하는 운동과 관련된 지식을 풀어가는 것은 꽤 큰 행복이었다. 지금까지 쓴 칼럼은 1000편이 넘는다.

아마추어 출신이 골프 칼럼을 쓰면서 마음 한구석에선 '내 실력을 공인받아야 한다'는 부담이 생겨났다. 마침 한 일간지에서 미국 PGTCA가 한국에서 골프 레슨프로를 선발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해 당당히 상위권(15위) 성적으로 입상했다. 최고령 레슨프로가 된 것이다. 처음 골프를 시작하던 1982년에도 그랬지만 일단 부딪치고 보는 성격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서울시내에 유명하다는 레슨프로들을 찾아다니며 '동냥'하듯 골프를 배웠다. 내가 직장에서 일은 등한시하고 골프만 친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주말 골퍼'였다. 다만 해외 출장이 잦았고 업무상 골프를 칠 일이 많았다.

레슨프로 자격증을 딴 직후 재취업에도 성공했다. 경기도 분당의 한 주상복합아파트 체육시설에서 전문강사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생전 처음 남에게 골프를 가르치면서 지난 20년 골프 인생이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오후 2시에 출근해 밤 10시까지 근무하는 생활이었지만 즐거웠다. 원고료로는 부족하던 차에 고정 수입이 생기니 경제적으로도 큰 보탬이 됐다. 여기서 나는 4년반 동안 1만번이 넘는 레슨 '기록'(?)을 세웠다.

내 교수법은 '실전 골프'에 가깝다. 초보자들에게 퍼팅 먼저 익히게 하고, 그 다음 쇼트게임 순서로 가르친다. 스윗스팟에 공을 맞히는 감각을 먼저 익혀주는 미국 방식이 실전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다. "오른손으로 왼쪽 무릎을 때리는 듯한 기분으로 스윙하라" 등 나만의 골프 교습 노하우도 하나둘 쌓여 갔다. 짬짬이 책도 두 권을 냈고, 미국 애틀랜타의 '티칭프로 아카데미'에도 다녀왔다.

골프 레슨을 하면서 정작 필드에 나갈 일은 많이 줄었다. 주말에도 연습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정한 실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늘 걱정이었다. 그래서 가끔 플레잉레슨을 나갈 기회가 생기면 별도의 레슨비는 받지 않았다. 가끔씩 내 그린피를 직접 부담하기도 했다. 수강생들의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충남 천안에 있는 나사렛대학교 대학원 평생교육원에서 골프 겸임교수 제의가 들어와 자리를 옮겼다. 대학교로 옮긴 후에도 성인들과 은퇴 이후 처음 골프를 시작하는 실버 골퍼들을 많이 가르쳤다. 실버들은 젊은 강사보다 같은 연배의 나를 훨씬 편하게 생각했다. 나는 단순히 공치는 기술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골프 매너에서 골프 역사, 유명 선수들의 습관 등 골프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많이 들려주는 편이다. 2008년 가을부터 2009년 봄까지는 경기도 의왕시 백운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들에게 골프 레슨 봉사를 하기도 했다.

요즘 나는 일을 모두 접고 골프 칼럼과 책을 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내가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하는 심정으로 지난 10년의 레슨 경험을 담아 주말 골퍼들에게 유용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인터넷 카페 '까칠골프'(필드에서는 내가 조금 까칠하다)를 통해 바른 골프문화운동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불러만 준다면 언제든 나가서 골프를 가르칠 준비가 돼 있다. 나는 레슨프로니까.

※ 앙코르 내 인생 관련 문의 이메일 encor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