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만주의 경상도 마을

중국과 수교하기 전 소설가 박경리씨와 만주(滿洲)를 여행하다 박씨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본 일이 있다. 하얼빈시 교외 조선족 가정에 갔을 때였다. 박씨의 경상도 사투리를 귀담아듣던 그 집 안주인이 박씨에게 "고향이 어디시냐"고 물었다. 박씨가 "경남 통영"이라고 하자 안주인은 "아이고, 우리 어머니 친정도 통영인데, 통영 산양면이요"라는 것이었다.

▶주인이 안에서 뭔가를 들고 나왔다. 놋그릇과 놋숟가락이었다. "할아버지가 고국에서 올 때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요즘 것들보다 한결 큼지막했다. 박경리씨가 놋그릇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박씨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이불 보퉁이 속에 밥그릇과 숟가락을 넣어 남부여대(男負女戴) 두만강을 건넜을 그의 조부모, 부모를 떠올리면 눈물 외에 무엇이 필요하리.'

▶일본강점기 우리 이주민을 만주로 실어나르는 기차를 '기민(棄民) 열차'라고 했다. '기민'은 버려진 백성이라는 뜻이다. 일제의 수탈이 갈수록 심해져 소출의 절반을 바치고라도 국내에서 소작을 지을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도 안 되는 사람들은 만주로 향했다. 당시 '삼천리' 잡지는 '만주 가서 돈 벌려면―권위자들 모여 원탁회의 열다'라는 좌담 기사를 실었다. 한 참석자는 "조선에서 한 평 살 돈이면 만주 가서 20평을 살 것이외다"라며 '만주 드림'을 부추겼다.

▶만주의 한국인은 1910년 20만명에서 1945년 170만명으로 불어났다. 1930년대 만주행 막차를 탄 것은 경상도 사람들이었다. 간도는 함경도 사람, 봉천(심양)은 평안도 사람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경상도 사람들은 만주에서도 북쪽 길림·장춘·하얼빈으로 올라갔다. 길림시 근처에 경상도 사투리와 풍습을 고스란히 지키고 사는 '경상도 마을'이 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이 한옥을 짓고 한국 전문가들과 함께 온돌 공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배고픈 한국인들이 찾아간 만주는 기회와 희망의 땅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인들의 구박, 영하 30도 추위, 출몰하는 마적과 싸우면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우리 언어와 문화를 간수해왔다. 고구려만 만주의 우리 역사가 아니다. 일본 강점기 온갖 어려움 속에서 한국인들이 삶을 이어온 만주의 경상도 마을은 우리의 '문화 영토'요, 그곳 역사는 우리 현대사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