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외할머니의 고추장 단지

기록적인 폭우로 물난리와 산사태가 온 나라를 휩쓸고 간 며칠 전. 문득 외갓집 앞산의 외할머니 무덤가를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지 올해로 10년째. 양지바른 곳에 모셨지만 그래도 편안하신지….

삼형제의 맏아들인 나는 어릴 적 대단한 개구쟁이였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어머니는 방학 때마다 나를 외갓집에 보냈다. 덕분에 나는 농촌에 대한 감성이 풍부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유년기의 소중한 기억 속에는 늘 외할머니가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가난한 외손자의 살림집을 찾으셨다. 그리고 작은 고추장 단지를 건넸다. 당신이 직접 담근 '할머니표 고추장'. 시중에 판매되는 화려한 이름의 고추장과 같은 맛은 아니었지만, 잊고 지냈던 외할머니의 손맛 그대로였다. 아껴 먹겠다는 생각에 냉장고 깊숙이 단지를 보관해 두었지만, 잠시 그 존재를 깜빡 잊고 말았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나서야 냉장고 속 고추장 단지를 발견했다. 조심스레 뚜껑을 열고 고추장 맛을 보았다.

놀라움, 반가움, 미안함. 이 세상 단 하나의 고추장 맛으로 외할머니는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외할머니의 고추장 단지는 바닥을 드러냈고, 나는 다시 맛볼 수 없는 그 손맛 때문에 외할머니의 부재를 또 한 번 실감해야 했다.

누군가 "문화유산은 우리를 과거의 기억으로 이어주고, 우리의 존재감을 공고히 해준다"고 했던가. 외할머니의 작고 텅 빈 고추장 단지마저 지금 나에게 더없이 소중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