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땅에서 온 음악가들, 분단의 땅에서 '합창(베토벤 교향곡 9번)'

오락가락하던 이슬비가 사라지고 귀청을 찢을 듯하던 매미 소리도 멎었다. 군사분계선과 불과 7㎞, 분단의 상징인 임진각에 환희와 평화, 희망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1만여 관객도, 세계적 지휘자와 연주자도 모두가 하나의 감동, 하나의 염원으로 하나가 된 무대였다.

◆'합창', 암흑에서 광명으로

공연 시작 서너 시간 전부터 임진각 너른 언덕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분쟁의 땅 중동의 젊은이들이 한반도에서 잊지 못할 합창을 들려주는 걸 일곱 살 딸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경기도 수원에서 차를 달려왔다"는 30대, "북쪽 고향을 그리워하다 끝내 눈 감으신 부모님 생각에 한편으론 마음이 아리고, 한편으론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50대도 있었고, "역사적 순간을 놓칠 수 없어 기차 타고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스무 살 대학생 연인도 있었다.

1시간여에 걸친 연주가 끝난 뒤 관객들은 "오늘 이 공연 자체가 하나의 기적"(김수미씨) "오랜만에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담았다"(정은교씨) "바렌보임과 서동시집도 좋지만 우리나라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임진각에서 여는 연주회를 보고 싶다"(서준규씨)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온 김정환(45)씨는 "'합창'에서 느낀 전율과 감동이 북쪽 동포들에게도 들리지 않았을까 싶다"며 "오늘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 말했다.

 

광복절인 15일 오후 7시 20분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대공연장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으로 차츰 물들었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요르단 등 중동지역 다국적 연주자들로 구성된 서동시집(西東詩集·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 세계적 소프라노 조수미·메조소프라노 이아경·테너 박지민·베이스 함석헌, 그리고 연합 합창단(국립합창단·고양시립합창단·서울 모테트 합창단) 120여명이 토해내는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로 전율했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백만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합창'의 가사 중)

◆"음악은 평화의 출발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합 운동을 펼치고 있는 유대인 지휘자 바렌보임은 분쟁지역을 찾아 연주회를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2005년 8월 21일에도 폭탄테러를 당한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연주했다. 바렌보임은 이날 임진각에서도 미리 녹화한 영상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베토벤은 180여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우리 곁에 함께 살며 인간의 강인함과 인류애를 강조합니다. 아직까지 분단된 한반도에 베토벤의 이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시각을 갖고 있는 남·북한이지만 하나가 되리라는 희망은 반드시 이뤄질 겁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 역시 영상을 통해 "전 세계 유일한 분단 국가인 한국이 오늘을 계기로 원곡에 담긴 환희와 인류애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소중한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바렌보임과는 처음 공연한 조수미씨는 "오늘의 이 공연이 분단 상황을 한꺼번에 뒤바꿀 순 없겠지만 우리가 내미는 화해의 손짓이라도 북한 사람들의 가슴에 가 닿아 대화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