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관객들, 내 '수궁가' 보면 울지도 몰라

"오, 나인(Nein), 나인…."

'켄터키 프라이드 할아버지' 같은 연출가가 고개를 흔들며 무대로 걸어 나왔다. "아니죠(nein). 동작이 너무 작아요. 여기선 이렇게 주저앉아서 힘을 팍 줘야 돼요." 그가 엉거주춤, 볼일 보는 동작을 선보이자 배우·스태프 사이에서 웃음이 터진다. 병든 용왕을 구할 간을 떼달라고 애원하는 별주부에게 토끼가 간 대신 똥을 싸서 "옜다, 받아라" 하고 던져 주는 장면이다.

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선 판소리 오페라 '수궁가' 연습이 한창이다.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이 사람은 독일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77). 그가 배우들 동작 하나하나를 지적할 때마다 통역이 부지런히 그의 말을 옮겼다. 독일 연출가의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궁가'는 9월 8~11일 제5회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세계 초연된다.

―어떻게 판소리를 연출하게 됐나.

"지난해 10월 아내(성악가 에스더 리)의 나라 한국에 들렀다가 국립창극단의 '춘향 2010'을 봤다. 흥미로웠다. 몇년치 프로젝트가 쌓여 있지만 새 작품을 맡아달라는 국립창극단 제안을 받고 욕심이 났다."

―가사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몇년 전 베를린에서 '수궁가' 완창 공연을 처음 봤다. 목소리의 높낮이, 동작의 절제, 창자(唱者)에게서 뿜어나오는 에너지, 청중들이 '얼쑤' 하고 넣는 추임새…. 굉장했다. 거친 것 같으면서 시적이고 민중의 철학이 담겨 있어 현대 예술의 근원이 될 가치가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 대중들은 사랑하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런가?"

프라이어는 독일의 대표적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수제자로 지난 50년간 세계 오페라 무대를 장악했다. 지난 2008년 독일에서 초연된 진은숙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무대도 그의 작품. 프라이어는 처음 시도하는 장르인 '판소리 오페라'에 대해 "다층적으로 만들어진 1인 판소리라고 생각해 달라"고 했다. '스토리텔러' 역할을 하는 '마담 판소리' 안숙선은 거대한 치마를 입고 5m 높이의 리프트에 앉게 된다. 프라이어는 "그녀를 만난 건 행운"이라며 "그 소리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 마이크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했다.

―안숙선, 고수, 가야금 주자를 뺀 모든 배역은 가면을 쓰고 노래한다. 왜 가면을 쓰나.

"용왕, 토끼, 별주부 등 배역은 모두 마담 판소리의 '말(언어)'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다. 관객들이 책을 읽듯, 이 극을 읽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외부인의 시각과 극단의 지향점이 충돌하는 건 없나.

"오, 많다. 나는 1인 판소리의 원형을 최대한 유지하고 싶은데 극단에서는 연극 같기를 바란다. 악기도 최소한으로 배제하고 싶은데 극단 측에선 자꾸 소리를 덧붙이려 한다. 그들은 '원형'만 갖고 하면 관객들이 지루해할 거라는데. 덜어내야 더 스펙터클하게 극을 끌고 갈 수 있다."

용왕의 병이 심해지는 셋째 마당에서 그는 궁중음악의 정수인 종묘제례악 '전폐희문'을 넣었다. 그는 "국립국악원에서 이 곡을 처음 듣고 전율을 느꼈다. 엄격함과 웅장함, 인간의 내면에서 나오는 울림,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은 왕의 욕망을 들었다"면서 "원형의 음악을 쓰고 싶은데 극장에선 가벼운 느낌으로 편곡된 걸 쓰려고 해서 아쉽다"고 했다.

―판소리 정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도 있다.

"난 르네상스나 그리스 시대 정서도 이해 못하긴 마찬가지다. 유럽의 시각으로 본 판소리를 이야기하면 안 되나? 판소리가 독일에서도, 미국에서도 계속 분석되고, 재조명되면서 풍부해지길 바란다."

―유럽에선 파격적 연출로 논란을 낳았는데.

"논란을 만들려고 작정하고 만든 적은 없다. 한쪽에선 '우~우~(야유)' 하지만 한편에선 '브라보(환호)'를 한다. 지금도 유럽에선 내 무대가 40년째 올라가는 게 많다. 40년 후인 지금은 모두가 열광한다."

'수궁가'는 12월 22~23일 독일 부퍼탈 시립극장에서 '미스터 래빗과 드래건 킹(Mr. Rabbit and the Dragon King)'이란 제목으로 유럽 관객에게 선보인다. "독일 반응이 어떨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브라보만 하겠지. 여기 담긴 한국적 색채들은 독일 사람들이 경외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절대 '우~우'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관람객들이 뮤지컬을 기대하고 온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극의 큰 축을 이해한 관객이라면 울지도 모르겠다. 울고 웃는 것이야말로 판소리의 한 부분이 아닌가."

▶국립창극단 '수궁가'=9월 8~11일 국립국장 해오름극장. (02)2280-4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