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전업주부에서 연극배우 된 윤순자(76)씨

나는 1935년에 태어난 할머니 연극배우다. 71세에 처음 데뷔해 50여 차례 무대에 섰다. 2009년 베를린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나간 독립영화 '파마'를 보았는가. 베트남 며느리를 괄시하는 못된 시어머니가 바로 나다. "할매 연기가 실감난다"며 다른 영화 섭외가 잇달았지만 영화는 그 한 편뿐이다. 다시는 영화 안 찍고 연극만 한다. 왕년에 최무룡 팬이었건만 막상 찍어보니 영화는 재미없더라. 골목길 막아놓고 촬영하는데 옆집 개가 왈왈 짖어 "컷!", 동네 사람이 빼꼼히 내다봐서 "컷!", 추운데 "한 번만 더 가자"며 "컷!"…. 장면별로 잘게 끊어 수없이 다시 찍는 영화보다 긴 호흡으로 쭉 가는 연극이 내 체질에 맞다.

내 고향은 청진, 차고 맑은 동해물이 평야 끝에 넘실대는 무역항이다. 광복 후 교도관 하시던 아버지(1910~1998)는 "임지가 바뀔 때마다 이삿짐 싸는데 넌더리난다"며 동백 피는 목포에 정미소를 차렸다. 그곳에서 목포여고를 졸업하고 서울 노량진에 올라왔다. 2년간 신용금고에서 홍일점 사원으로 경리를 보다 여섯살 위인 남편(1929~2001)을 만나 인천에 자리잡았다. 44년간 함께 산 그이가 10년 전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쓸쓸할 틈이 없게 살자"고 마음먹었다.

전업주부로 나이 든 사람이 별안간 어떻게 연극을 시작했냐고? 친정어머니가 괄괄한 함경도 여장부였다. 나도 그 피를 받아 활달하게 살았다. 외아들을 키우며 경찰서에서 청소년도 선도하고 민원인도 상담했다. 봉사하는 짬짬이 여행도 맘껏 했다. 쉰여덟살 때 딴 운전면허로 동네친구들을 내 차에 태워 팔도강산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러나 봉사와 여행보다 신나는 게 영화요, 연극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여배우들이 성춘향·이몽룡·변사또를 도맡아 하는 임춘앵 여성국극단이 대인기였다. 그들이 우리 동네 가까이 오면 놓치지 않고 찾아갔다. 시골집 온돌방에 빨랫줄을 걸고 어머니 쓰개치마로 '막(幕)'을 만들어 연극도 했다. 그때 내 관객은 동네 어르신들이었다. 시집간 뒤에는 나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친정아버지와 눈비를 뚫고 영화관을 찾아다녔다. 문희가 나오는 '미워도 다시 한번'(1967), 김희갑이 나오는 '황소 타고 시집 왔네'(1973), 도금봉이 나오는 '돌아온 팔도강산'(1976)…. 혼자 된 내게 누군가가 "인천 학산문화원에서 65세 이상 노인극단을 꾸린다"고 소개했을 때 "이거다!" 싶어 부리나케 뛰어갔다.

노인극단이라고 무시하지 말라. 우리는 창작극만 공연한다. 매주 화·목요일에 모여 저마다 살아온 얘기를 나누며 소재를 찾는다. 젊은 연출가의 도움을 받아 몇 달씩 대본을 다듬어 무대에 올린다. 교회·양로원·요양원을 돌며 15~20분짜리 단막극을 5~6편씩 연달아 무대에 올린다. 무료 위문공연이지만 보건복지부 노인일자리 사업으로 지정돼 한 달에 20만원씩 월급도 탄다. 요컨대 우리는 엄연한 '프로페셔널'이다.

내 첫 배역은 '찜질방에서 수다 떠는 동네 할머니'였다. A4 용지 7~8매 분량 대본을 통째로 달달 외웠다. 내 대사뿐 아니라 남의 대사까지 외워야 실수 없이 극의 흐름을 탄다. 무대에 서니 객석이 안 보였고, 대사를 잊어 숨도 콱 막혔다.

베테랑이 된 지금은 대본도 척척 외우고 관객 표정도 한 명 한 명 다 보인다. 한 번은 첩 때문에 속 썩는 주부 역을 맡았다. 친정아버지를 부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통곡하는 장면이었다. 내게 그런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역할에 몰입해 무대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더니 관객들이 곳곳에서 훌쩍거렸다. 노처녀 딸과 단둘이 사는 홀어머니 역할도 했다. "드라이클리닝 맡길 옷을 왜 물빨래 했냐"고 구박하던 딸이 동네 할아버지 사진을 들이밀며 재혼하라고 권한다. 나는 객석을 향해 하소연했다. "여러분, 요 못된 딸년 좀 보시오. 늙은 엄마 모시다가 자기가 시집 못 갈까 봐 멀쩡한 나를 다 늙은 영감한테 치우려 해요." 깔깔 웃는 객석을 향해 코를 팽 푸는 애드리브도 쳤다.

대본 외우고 연기 연습하느라 일주일이 후딱 가고 치매도 달아난다. 물론 재미있지만 단순히 재미 때문에 계속하는 건 아니다. 교회 공연은 몸 성한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해서 짜릿하다. 요양원·양로원에 가면 객석에 나보다 어린 치매 환자, 중풍 환자가 수두룩하다. 공연을 마친 뒤 관객 손을 꼭 잡고 "다시 올 테니 그땐 좀더 건강해져 계시라"고 인사한다. 어떤 이는 멍하니 반응이 없고 어떤 이는 희미하게 몸을 떨며 내 손을 마주 잡는다.

일흔 넘어서 건강하게 연극을 하는 나는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가.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받고 돌아오는 나는 학산문화원에 소속된 최고령 연극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