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세상읽기] 野神은 왜 '파도'가 되고 말았을까

대전에 유서 깊은 여관(旅館)이 있었다. '거북장'은 일본식 온천장 비슷한 구조로, 층(層)마다 중년 여성이 손님 시중을 들었다. 어느 날 거기서 난리가 났다. 알몸 사내가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코를 드르렁댄다는 것이었다.

고 김동엽(金東燁) 감독이었다. 다음 날 이 기인(奇人)은 이렇게 장광설을 풀었다. "내가 '게부랄티' 모델 된 이유 몰라? 활력의 상징이잖아. 피가 뜨거워 겨울에도 홀랑 벗지 않으면 못 자. 뭘 걸치면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김 감독은 6·25 때 월남해 경복중·고, 성균관대를 졸업했다. 한국전력·조흥은행에서 4년간 짧은 현역 생활을 했다. 1971년 건국대를 시작으로 공군, 실업팀 롯데, 성대, 한양대를 거쳐 프로야구 해태·MBC청룡에서 감독 등으로 그라운드를 종횡했다.

그는 야구도 잠버릇처럼 한 사내였다. 가장(假裝)하기 싫어했고 성격을 홀랑 드러내야 직성이 풀렸다. 선수를 앞뒤 안 재고 휘몰아쳤다. 심판과도 툭하면 싸웠다. 그렇게 해서 창단 팀마다 우승시키더니 '빨간 장갑의 마술사'가 됐다.

그래도 구단주에겐 고개를 숙였으면 좋으련만 똑같았다. 그래서인지 감독생활 16년간 목이 13차례 잘렸다. 성적과는 반대로, 1년짜리 감독이 된 것이다. 이런 성격은 해설자가 되고도 변치 않았다. 방송 관계자를 생방송 도중 '원산폭격'시킨 일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그래 짤라라 짤라'. 이런 제목의 책 한 권을 세상에 남긴 그는 1997년 독신자 숙소에서 숨졌다. 홀로 살았기에 시신이 며칠 뒤에야 발견됐다. 세상과 맞서다 '명장(名將)'아닌 '이단아'로 생을 마감한 이 성격파 감독이 갑자기 생각났다.

김성근(金星根) 감독 때문이었다. 칠십 언저리의 야신(野神)은 이번 해임이 12번째라고 한다. 그는 분명 저세상의 '빨간 장갑의 마술사'와는 성격도, 야구 방식도 다르다. 그런데 이제 본의 아니게 그와 '최다 해임' 기록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현해탄(玄海灘)을 건너 일본 후쿠오카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는 노장은 2년 전 이 지면에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다. '야구계의 파도이고 싶다'는 글은 "사람은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투로 시작된다.

"바다에는 파도가 친다. 거센 파도가 쳐야 산소 공급이 잘 돼 바다 밑 물고기가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야구계의 파도'이지 않은가? 나는 지금까지 많은 비난과 증오를 받으면서 이 나이까지 살아왔다. 조센징이라고…."

바다 저쪽 '야신'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감독님 혹시 저 기억하십니까. 조선일보 문갑식 기자입니다'. 1시간 뒤 답이 왔다. '잘 알지요. 지금 죄용히 있고 싶네요. 죄성합니다'. 침침한 눈으로 자판을 두들겼을 그 모습이 선했다.

올해로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30년째다. '야신'의 뒤를 이은 이만수 감독대행(代行)은 대체 몇 번째일까 궁금했다. 이상일 KBO 총장이 말했다. "나도 놀랐는데 겨우 57명째네. 감독과 대행 합쳐서."

최장수는 김응용 전 삼성 사장(18년)이다. 최단명은 1994년 OB 감독대행 최주억으로, 13일 만에 겨우 6게임을 치르고 물러났다. 8개 구단에서 감독한 이는 이렇게 적다. 겹치기가 많았기 때문인데 그걸 달리 보면 감독이란 자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된다. 내로라하는 스타 중 감독 못 된 사람이 숱하다. 그 자리야말로 실력·리더십·근성·인내심·대인관계의 총합, 스포츠 세계의 '꽃'이다.

그렇다면 감독의 모델은 최장수 기록을 세운 김응용일 텐데 얼마 전 그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100㎏ 거구가 바싹 말라 있었다. 스스로를 온갖 병을 달고 사는 '종합병동'이라고 했다. 양주를 코끼리처럼 넙죽 마시던 호기(豪氣) 대신 맥주 한 잔을 놓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특정인에게만 복(福)을 주는 신(神)은 없는 것이다.

야구만 보면 감독은 '황제'다. 그런데 노동법으로 보면 노동자다.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많은 걸 원한다. 지면 이기라고 한다. 이기면 우승하라고 한다. 우승을 해도 영화처럼 극적인 승리를 원한다. 그러고도 인간관계 얘기가 나온다. 거액의 연봉을 받는다는 건 이렇게 힘든 것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당대의 승부사 김성근과 구단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들려왔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만 비판할 수도 없다. 구단은 원하는 게 있었고 '야신'은 자기 방향이 있었다. 그게 아귀가 맞지 않아 '야신'은 소원대로 '파도'가 되고 말았다.

아쉬운 건 '야신'이 독특한 올드보이였다는 점이다. 능력 우선 시대에 '세상은 나이순(順)!'이라는 역설을 한 번쯤 보는 것도 통쾌하지 않은가. 그러나 '빨간 장갑의 마술사'가 그랬듯 고집쟁이를 받아들이기엔 우리의 틀이 너무 좁다.

분명 성공했지만 실패도 많이 맛본 그에게 위로의 답글을 준비해놓고도 차마 보내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뜻을 지닌 것은 바로 성공이란 단어다." 도스토옙스키가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