삯바느질로 모은 5억원 내놓은 할머니

스물다섯 새댁은 세 살 난 딸을 업고 신의주를 떠나 보름 넘게 걸려 서울에 도착했다. 1948년 4월의 일이다. 정작 서울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쳤다. 먼저 서울 가서 기다린다던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꿈에 그리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서울 땅에 어린 딸과 단 둘이 남겨졌을 때, 설상가상으로 일이 벌어졌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6·25전쟁이 터진 것이다.

기댈 언덕 하나 없었던 새댁은 수녀들과 함께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 21세 때 신의주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였던 인연으로, 피란길에 만난 성가소비녀수녀회 수녀들이 그녀를 도왔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근처에 있던 양재소(사제 의복을 만드는 곳)에서 사제와 신학생들이 입을 옷을 만들었다. 아파도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았다. 1000원 한 장 스스로를 위해서는 쓰지 않았다. 딸도 그렇게 키웠다. 구순 가까이 이른 지금까지도 그 원칙은 그대로이다. 그러고는 평생 모은 전 재산, 관악구에 있는 125.6㎡(38평) 아파트 한 채를 평양교구 성당 건립 기금으로 내놓았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22일 "김숙일(헬레나·88) 할머니가 지난 12일 (평양교구장을 겸하고 있는) 정진석 추기경에게 5억5000만원 상당의 아파트 한 채를 기증했다"고 밝혔다.

"제 평생 소원이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들을 위해 성당을 짓는 데 힘을 보태는 거였어요. 어쩌면 제가 통일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하느님 곁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지요. 오늘 작은 예물을 기쁘게 내놓는 것도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입니다." 김씨는 "가진 걸 모두 드릴 날을 평생 기다려왔다"며 "이제는 여한이 없다"고도 했다. 정 추기경은 "언제든 통일이 되면 이 귀한 재산이 평양교구 재건에 빛이 될 것"이라며 고마워했다.

김씨의 딸 차영주(아녜스·66)씨는 "북에 남은 가족과 동포들을 위해 기원하는 것이 평생 어머니의 기도 내용이었다. 단 하루도 묵주를 손에서 놓거나 미사를 거른 적이 없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