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사회 갈등의 당사자 돼… '21세기 아소카(종교 평화 강조한 인도 왕) 선언' 필요했다"

"종교인이 독선과 아집을 조장하고 분쟁과 갈등을 일으켜 온 것을 반성합니다. 이웃 종교를 진정한 이웃으로 대하는 데 충분치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이웃 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겠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 종교를 비방하거나 개종을 목적으로 전법(傳法)하지 않겠습니다. 인정과 관용을 넘어, 귀 기울이고 배우려 노력하겠습니다…."

한국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 23일 통렬한 자기반성과 함께 철저한 쇄신을 선언했다. 이날 발표한 '21세기 종교평화를 위한 불교인 선언 - 21세기 아소카 선언' 초안이다. 조계종이 8개월에 걸쳐 각계 인사들의 뜻을 모아 마련한 초안 작성 작업을 주도한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도법(道法·62) 스님을 이날 서울 견지동 화쟁위 사무실에서 만났다. 스님은 "불교 역시 한국사회 갈등과 종교평화 문제의 당사자다. 국민 앞에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깊은 자기반성을 담고자 노력했다"고 했다.

―왜 '21세기 아소카 선언'인가?

"약 2300년 전 인도 아소카왕은 불교도였지만 권력으로 다른 종교인을 억지 개종시키지 않았다. 곳곳의 석주(石柱)에 비문을 남겼다. '자신의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큰 해가 되며,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21세기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 그대로 적용해도 괜찮을 만한 종교 평화의 귀감이다. 부처님도 늘 당대 사회의 가장 시급하고 구체적 문제의 현장에서 해답을 내놓으셨다.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 종교 갈등은 오래 방치될수록 위험해진다.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빠를수록 좋다."

―왜 속세가 종교를 걱정하는 상황이 됐다고 생각하나.

"종교가 존재 이유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경전에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시민과 사회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불교, 종단, 사찰, 불교인의 존재 이유다. 그걸 잊어선 안 된다."

―불교는 현 정부 들어 종교차별금지를 요구하는 등 종교갈등의 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앞으로 불교는 갈등의 당사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나.

"손바닥을 부딪치지 않으면 박수 소리가 나지 않는다. 종단도 어떤 정치적, 물리적, 정신적 폭력 상황에서도 비폭력적 대응하겠다는 다짐이다. 안 싸우고 해결하려 들면 그런 흐름과 길이 열린다. 세상은 종교, 민족, 국가, 이념의 이름으로 편 갈라 싸우고, 힘 길러 제압하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 믿었다. 그 결과가 뭔가. 끝없는 싸움판이었다. 문제는 옮겨다니거나 반복 확대될 뿐 해결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벌어진 전쟁의 70%가 종교 전쟁이었다. 이제는 좀 철이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악순환과 악습의 고리를 끊고 평화롭게 더불어 갈 수 있는 길을 넓혀가야 하지 않겠나."

―일반인들은 조계종단의 '자성과 쇄신 결사'나, 정부의 '공정한 사회' 같은 구호를 실감하지 못한다.

"말은 내놨는데 현장에서 그 내용을 만들어가는 작업이 없으니 공허한 것이다. 잘못한 게 있으면 투명하게 고백하고 공개해야 한다. 조계종단의 가장 큰 문제가 사찰 재정공개라면 해야 한다. 처음에는 총무원이 해야 한다. 그게 자성과 쇄신이다. 그리고 직영 사찰, 직할 사찰, 전국 사찰로 확대해가야 한다. 다 함께 하면 그게 결사(結社)다. 내용을 구체화시켜내면 어떻게 의심할 수 있겠나."

―'자본주의 4.0'처럼 근본적 경제 체제의 작동 원리를 다시 쓰자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새로운 개념은 진화를 앞당기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사는데, 그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려면 오른손을 써야 할 때도 왼손을 써야 할 때도 있는 것 아니겠나."

―종교평화선언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종도들의 참여와 결심을 담아서 10월까지 최종안을 공식화할 것이다. 현실 사회가 다문화 다종교 사회인 것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다. 국민들이 각각의 종교에 대한 건전한 상식과 교양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과서 반영이라든가, 매뉴얼을 만든다든가, 이웃 종교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나갈 것이다."

☞아소카 왕

기원전 3세기쯤 아프가니스탄 남부부터 인도 대부분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한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정복왕으로 이름 높았으나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고 불교에 귀의한 뒤 무력 정복을 중단했으며, '다르마(dhar ma·法)'에 의한 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았다. 종교적 관용과 평화정신을 새긴 '아소카 석주(石柱)'를 인도 전역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