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골수 팬들, 대중가요 100년 전설을 깨우다

낭랑한 목소리의 가객(歌客) 고복수, '목포의 눈물' 이난영의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 주옥같은 노랫말을 쓴 손로원과 강사랑. 극작가 겸 작사가 김능인, 북으로 건너간 작사가 박영호, 작사가이자 배우·극작가였던 김성집, 가요·동요·민요 작곡가 형석기. 이제 고인이 된 이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1950~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가요계를 주름잡던 주역들로 모두 1911년에 출생한 동갑내기들이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들 한국 대중가요계 초기 8인방의 노래 21곡이 손자 또는 증손자뻘 되는 아마추어 팬들에 의해 빛을 보게 됐다. 옛 가요 사랑 모임 '유정천리(有情千里)'가 직접 음원을 발굴해 제작한 '백년의 인물, 백년의 노래-탄생 100주년 옛 가요 명인 선집'이다.

음반사나 특정 가수의 기념사업회가 원로 대중가요인들의 복원 음반을 간간이 내긴 했지만, 팬들이 주축이 돼 '탄생 100주년'이라는 테마로 복원음반을 낸 것은 처음이다. 가요 전문가들은 "문화담당 부처나 대형 음반사들이 진작 했어야 할 일을 해냈다"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2009년 11월 결성된 '유정천리'는 가수 박재홍의 노래 제목에서 이름을 따왔다. 초기에는 전통가요를 좋아하는 사회 유명인사들의 소모임이었지만 점차 나이와 직업의 벽이 허물어지며 매달 회비 1만원을 내는 회원이 120여명까지 늘어났다. 시인인 이동순 영남대 국문과 교수가 회장을 맡고 있고, 홍성우 변호사, 시인 신경림·정호승·김정환, 김장실 예술의 전당 사장, 도서출판 선 김윤태 대표, 시사평론가 정관용씨 등 정치·사회·문화계 인사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준희 총무는 "21곡 중 상당수가 일반에 처음에 공개되는 음원"이라고 했다. 1차로 300여장의 CD를 만드는 데 들어간 제작비 300여만원은 그동안 모은 회비로 자체 충당했다.

회원들은 "막상 어려울 것 같았던 작업이 너무 순조로워 우리도 놀랐다"고 했다. "회원들 가운데 가요 역사에 훤한 마니아, 일제시대 희귀음반 소장가, 음반 제작 전문가들이 골고루 있어 음원 발굴부터 음반 제작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회원인 인터넷 음악사이트 '가요114' 운영자 김광우씨가 프로듀서를 맡고 자신이 갖고 있던 음원도 제공했다.

고복수와 이난영이 듀엣으로 부른 '봄소식(1936년)', 고복수의 대표곡으로 알려졌지만 이연신이라는 무명(無名) 여가수가 리메이크한 '타향살이(1937년)', 일본 빅타 레코드 관현악단이 반주한 김용환의 노래 '술취한 진서방(1939)'등 수록곡들은 모두 일제시대 축음기용 SP음반에서 복원했다. 특수 바늘을 장착한 턴테이블에서 SP음반을 재생한 뒤 잡음을 없애는 작업을 거쳐 CD로 옮겼다고 한다.

이동순 회장은 "1911년처럼 한 해에 대중음악 인재들이 유독 많이 태어난 것은 한국 가요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경우"라고 했다. 그는 "문학가나 순수음악가의 경우 탄생 100주년 행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이분들에 대한 기념행사는 어디에서도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라고 했다. 홍성우 변호사는 "일제시대와 해방 전후, 6·25전쟁 시련기를 거치며 우리네 삶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전통가요가 '뽕짝'으로 폄하되기 시작했고, 이 음악을 하는 가수들마저 열등감을 보일 때가 있다"며 "이번 음반으로 대중가요인들의 가치가 재평가되길 바란다"고 했다. 문화부 차관을 지낸 김장실 사장은 "어느 시대를 대표하는 히트 가요들은 그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며 "이를 복원하는 건 우리 얼을 찾는 작업"이라고 했다. 김윤태 대표도 "현재 K팝 전성기의 밑바탕이 된 선배 음악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족보를 찾는 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유정천리는 원래 회원들끼리 나눠 가질 목적으로 음반을 만들었지만, 구매 요청이 이어지자 발송비는 받지 않고 1만원에 판매하기로 했다. 유정천리는 앞서 지난해에는 '황성옛터'의 가수 이애리수 타계 1주기를 맞아 그의 대표곡 20곡을 모은 CD를 냈다. 내년에는 가수 남인수 타계 50주년을 기리는 전집 음반을 낼 계획이다. 유정천리의 연락처는 songcing@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