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피아노학원 원장에서 문화재 복원 연구원 된 이영(63)씨

나는 매일 기원(紀元) 전후를 넘나들며 신석기·청동기·원삼국·백제시대의 사람들과 만나고 돌아온다. 경기도 수원시 인계동 경기문화재연구원 유물관리팀 토기전문복원실이 내 일터이다. 경기도 및 중부지방의 여러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나온 토기(土器) 중 손상된 것을 가져와 원형 그대로 살려내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은 김포 양곡지구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토기를 다루고 있다. 하루에 여러 개를 취급할 때도 있고, 하나에 며칠씩 붙들려 있어야 할 때도 있다. 새로운 유물을 만날 때는 새 연인을 만난 듯 가슴이 설렌다. 먼 옛날 누군가가 만든 '손누름' 자국에 내 손을 살며시 올려놓고 있다가 까무룩 밤 10시를 넘기는 날도 많다. 바스러지기 쉬운 옛 토기를 만지려면 약품 처리도 해야 하고, 혹시나 중요한 단서가 될 만한 흔적은 없는지 조심조심 만지는 일은 내 적성에 딱 맞는다.

환갑이 다 되어 진학한 대학에서 나는 문화재보존학을 전공했다.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05학번인 나는 200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직이 되어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그 사이 석사과정(고고학)도 마쳤다. 내 대학 동기들은 아직도 파릇파릇한 20대이다. 환갑도 다 지난 나이에 큰아들 장가까지 보내고 여기서 일하게 될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삶은 참 신기하다. 뭔가에 집중해 빠져들다 보면 항상 새로운 길이 열렸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아들 둘을 둔 나는 작은아들이 네 살 무렵부터 피아노학원을 운영했다. 서울 논현동과 대치동에서 20년 가까이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면서 재능 있는 아이를 많이 만났고, 그 아이들이 음악도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잠깐 해볼까 하고 시작한 일은 아이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학원에 강도가 들어 큰 사고가 날 뻔한 일을 겪으면서 흥미를 잃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을 접었다.

그러고 나서 접한 것이 사진이었다. 결국 '사진 공부'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줬다. 나는 분당의 한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사진을 배우다가 전문 사진가를 꿈꿀 정도로 빠져버렸다. 유명 사진작가들에게 직접 배워가며, 전국의 오지 출사(出寫)와 암실 작업, 핀홀 카메라 제작, 적외선 사진, 비은염 사진, 조색·마운트까지 사진의 거의 모든 과정을 섭렵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기어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었다. 외동딸인 내 고집은 어려서부터 아무도 꺾지 못했다.

사진을 시작하면서 내 삶은 새로운 날개를 달았다. 아이들도 더는 내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기들 곁을 지키느라 매여 살았던 엄마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지, 아이들은 내가 출사 나갔다가 돌아오면 "우리 엄마 잘 '놀고' 계신다"고 농담을 했다.

하지만 사진가의 꿈은 결국 접어야 했다. 창조적 사진가가 되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함을 절감하면서, 전국으로 출사 다니며 보았던 문화재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특히 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기록 사진인 유리 건판 사진을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진을 배우면서 화학약품에 대한 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유물 복원에 사용하는 화학약품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만학도로 대학에 들어가면서 문화재 복원을 공부하기로 했다.

지금 하는 일은 학부 3학년 때 인턴으로 시작한 일이 손에 익어 결국 계속하게 됐다. 유물을 복원하면서 단계마다 사진 자료를 남겨야 하고, 먹선이 다 날아간 옛 그림은 적외선 촬영으로 먹선 흔적을 찾아내는 등 사진에 관한 실무 지식은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려고 그동안 먼 길을 돌아 제자리에 안착한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오랫동안 공부하고 배운 것을 사장(死藏)하지 않고 써먹을 수 있게 된 것도 무척 다행스럽다.

동기생인 20대 대학생 친구가 언제인가 "우리 엄마는 손자들 재롱 보며 친구들과 놀러다니며 사는데 왜 힘들게 일하며 지내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제야 내가 좋아하고 정말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좀 더 일찍 찾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아직도 꿈이 많다. 박사과정에 진학도 하고 싶고, 잠시 접어두었던 유리 건판 사진 공부도 해야 한다. 늙는다는 것이 경쟁력 저하로 치부되고, 노인들은 무기력하고 답답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우리 사회의 편견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열심히 사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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