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팔 없어도 자랑스러운 아빠이고 싶어요"

1984년 10월, 두 아이를 둔 29세의 전기 기사가 2만2000V의 고압 전류에 감전돼 두 팔을 잃는다. 10여 차례의 수술을 거친 후 무기력한 세월을 보내던 그에게 1988년 어느 날 네 살짜리 아들이 "아빠, 그림 좀 그려줘"하고 졸랐다. 병석에 있느라 아들과 놀아준 적이 없어 내심 미안했던 그는 의수(義手) 갈고리에 볼펜을 끼워 조류도감의 독수리를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 "와, 아빠. 진짜 새 같아!" 아들의 칭찬에 용기를 얻은 그는 참새·까치·제비 등의 새들과 아톰·손오공 등 만화영화 캐릭터들을 그려 연습장 한 권을 가득 채웠다.

"'양팔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아빠'보다는 '양팔이 없어도 뭔가 할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었어요." 24일 오전 서울 대방동의 작업실에서 화가 석창우(56)씨가 옛 이야기를 하며 빙긋이 웃었다. 그는 26일부터 다음 달 8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청작화랑에서 서른 번째 개인전을 갖는다. 이 전시에 석씨는 달리고, 창을 던지고, 피겨 스케이팅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운동선수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크로키(움직이는 동물이나 사람의 형태를 빠르게 그린 그림) 작품 30여점을 내놓았다.

아들을 기쁘게 해주려 시작한 그림에 점점 재미를 붙였던 석창우씨는 사군자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다. "'두 팔이 없는데 가능하겠냐'며 망설이는 선생님께 '내가 포기할 때까지 가르쳐 달라'며 졸랐어요. 처음엔 붓대에 구멍을 내고 갈고리에 끼워 그림을 그렸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갈고리로 붓을 잡고 그리게 됐죠."

침식(寢食)도 잊고 그림에 빠져든 그를 보다 못한 아내가 "이러다 죽겠다"며 말렸지만 그는 그만두지 않았다. "사지육신이 멀쩡할 땐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주말에 낚시나 다니는 게 유일한 낙이었죠. 두 팔을 가지고 살았던 인생 전반부와 두 팔이 없이 산 인생 후반부를 비교해 보면, 두 팔 없이 산 세월이 훨씬 재미있고 행복해요.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한 거니까요."

사군자에서 누드 크로키로 옮아갔다가 운동 장면 크로키를 주로 그리게 된 것은 1998년부터. 나가노 동계올림픽 여자 피겨 스케이팅 은메달리스트인 미국 선수 미셸 콴의 연기에 감명을 받은 게 계기가 됐다. 그 이후 그는 박찬호·선동열·김연아 등 스포츠 스타들의 경기 모습, 축구·농구·경륜(競輪) 등 다양한 운동선수를 화폭에 담았다. "제 몸은 부자유스럽지만, 제 안에서 꿈틀거리는 에너지는 누구보다도 역동적입니다. 힘차게 움직이는 선수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저는 움직이고 싶은 내면의 욕구를 화선지 위에 쏟아붓는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