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윤덕의 사람人] 림프종 癌백신 개발한 래리 곽 MD앤더슨 암센터 교수

'암(癌)'이 당뇨병이나 고혈압처럼 평생 달래야 할 '친구' 정도로 간주되는 시대는 과연 올까.

래리 곽(52)은 이 꿈 같은 세상을 현실로 앞당긴 인물이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를 이용해 암세포를 죽이는 백신을 개발, 세계 암 연구에 새 장을 열었다. 그 공로로 지난해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교포 2세인 래리 곽은 세계 최고의 암 임상연구센터로 명성이 높은 텍사스대 MD앤더슨 암센터 교수다. 암백신 연구에 뛰어든 건 미국국립암센터(NCI)에서 일하던 1999년. 그로부터 20년 만인 2009년 악섬림프종 백신을 개발, 그 효능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아산병원 종양학과 김성배 교수는 "암백신에 대한 연구가 20~30년간 의학계에서 이뤄져 왔지만 그 중 치료백신으로 효과가 인정된 것은 전립선암 백신, 악성흑색종 백신, 그리고 이번에 래리 곽 교수팀이 개발한 낭포성 림프종 백신뿐"이라면서, "백신이 기존 항암치료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사례로 그 원리를 다른 암 치료에도 적용할 수 있어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8월초 재미한인의사협회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래리 곽 교수를 만났다. 선한 눈망울을 지닌 그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것을 무척 미안해했다. "부모님은 미국이란 나라에서 소수민족으로 성공하려면 영어를 완벽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저희에게 한국말 가르치는 것을 깜박하셨습니다.(웃음) 하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한국적 유산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암세포를 죽이는 백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됐다.

"암 백신 개발에 전념해 온 나의 20년을 인정받게 돼 감사할 뿐이다."

―사람의 몸에 이미 번식한 암세포를 제거한다는 게 흥미롭다.

"화학요법으로 암세포가 어느 정도 제거된 시기에 백신을 투여하면 남아 있는 적은 양의 암세포까지도 찾아내 치료할 수 있다. 다른 약이나 방사선에 비해 독성이 적다는 것도 강점이다. 암백신 연구가 진전되면 '암을 관리한다'는 개념이 현실화될 것이다."

―암백신은 우리 몸에 들어와 어떻게 작동하나.

"암백신은 암세포 표면에 있는 종양항원(특이 단백질)을 이용, 환자 몸속의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적군으로 인식하게 도와서 암을 공격하게 하는 치료법이다. 다시 말해 악성림프종 환자의 종양 일부를 떼어 종양항원을 얻은 후 거기에 운반체와 면역증강제를 혼합해 환자에게 주입하면 환자 몸속의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아군이 아닌 적군으로 인식해 공격한다는 얘기다. 항암화학요법(항암제)과 방사선 치료는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세포에도 손상을 주어 부작용을 수반했다면, 암백신은 암세포만 선택적으로 치료하기 때문에 부작용이 적고 효과가 오래 지속된다."

―종양학자들은 '3상 임상시험을 통해 그 효능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는 데 큰 의미를 두더라.

"치료약제를 개발해 효과를 입증하려면 인체에 해가 없는지 확인하는 1상 임상시험, 약제가 특정 질환에서 효과가 있는지를 보는 2상 임상시험, 기존 약제와 비교해 우월한 효과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3상 임상시험 과정을 밟아야 한다. 우리의 백신은 그 효과가 미국 국립암센터(NCI)가 후원하는 3상 임상시험을 통해서 증명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우연히 얻은 결과가 아니라는 얘기다."

―3상 임상시험의 구체적인 내용은 어떤 것인가.

"항암제를 투여해 최소 6개월 이상 육안으로 암세포가 보이지 않게 된 환자 117명 중 76명에게는 종양항원＋운반체＋면역증강제를 혼합한 '종양특이 암백신'을 투여하고, 나머지 41명에게는 종양항원 없이 운반체＋면역증강제만 투여했다. 그 결과 백신을 투여한 환자들은 암이 다시 재발하는 데 44개월이 걸린 반면, 그렇지 않은 환자들은 30개월 만에 암이 재발했다. 그중 몇몇 환자는 수년간 재발이 없는 상태다."

―임상시험 과정에서 백신으로 암을 치유한 환자가 있나.

"17년 전, 2상 임상시험을 진행할 때 나와 동갑인 남성 환자가 있었다. 아들 넷을 두어 연민이 더욱 느껴졌다. 그를 위해서라도 암백신을 개발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림프종 백신을 맞고 그는 지금까지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백신이 한국의 환자들에게 도달하기까지는 얼마나 걸릴까.

"FDA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일부 추가적인 임상시험이 뒤따라야 한다. 한국 제약업계가 얼마나 관심을 갖는지도 관건이다. 1998년 미국에서 유방암 치료제가 개발됐을 때 한국에선 2001년 첫선을 보였다고 들었다."

◆감소하는 미국 암 사망률

―최근에는 '대체의학'으로 암을 치료하려는 시도들이 늘고 있다.

"시도 자체는 의미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대체의학에는 현혹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무슨 저널에 실렸다고 해서 그걸 다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항상 임상연구라는 틀에서 접근해야 하고, 그 결과 또한 제삼자가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에서 검증받아야 한다. 새로운 치료법에 관심이 있다면 공식기관의 승인을 받은 임상연구에 참여하는 게 좋다."

―암 자체보다 암이라는 진단에 충격받아 기대 생존기간보다 일찍 사망하는 사례도 많다더라.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이 있으면 암 투병에 훨씬 효과적이다. 비교연구도 있다. 암을 이겨낼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해주는 그룹이 있는 환자의 치료 성적이 훨씬 좋다."

―가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겠다.

"문제를 직시해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대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암이 아니다'라고 거짓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암 사망률 추세는 어떠한가.

"1991년에는 암환자 10만명당 215명이 사망했다. 2007년에는 10만명당 178명으로 줄었다. 미국 정부는 암 연구에 가장 직접적인 지원자다. 엄정한 평가를 통해 경쟁력 있는 연구 프로젝트를 선정한다. 우리 센터에서 따낸 프로젝트의 경우 각각 600만~120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의사이고 과학자이면서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들었다. 과학과 신앙이 양립할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즐겨 읽는 책이 프랜시스 콜린스의 '신의 언어(The Language of God)'다. 과학과 신앙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신의 손길'을 느낀 적이 많다. 이번 백신 개발도 막대한 연구비용 때문에 좌초 위기에 놓였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도와주더라.(웃음)"

◆'한국'이라는 유산

래리 곽은 "나는 한국이라는 위대한 민족적 백그라운드에서 자라났다"고 말한다. 백그라운드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다. 부친 곽노환은 서울대 물리학과를 나와 미국 터프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캔자스대 교수로 40년간 재직한 물리학자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든 100퍼센트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우리가 미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면서." 래리 곽 교수 또한 4남매를 '한국식'으로 키웠다고 했다. 세 아들이 텍사스, 브라운, 코넬대학에서 각각 의학, 엔지니어링,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 MD앤더슨 암센터에서 1년간 펠로십을 한 김성배 교수는 "밤 8시부터 2시간 동안은 곽 교수님과 어떤 연락도 되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자녀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며 웃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암백신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들었다.

"캔자스대학에서 이뤄진 의학 연구 과정에 참관할 기회를 얻었다. 대학에 한국인 병리학자 한 분이 계셨는데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더라. '우리의 면역체계를 활용해 암을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이 나를 매료시켰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다.

"모든 일에 '동기'를 부여해주셨다. 학교 숙제를 완벽하게 해내면 25센트의 '상금'을 주셨다. 어릴 때부터 쓰레기통 비우는 일은 내 몫이었다. 자라면서 그 일의 강도가 높아졌다. 일을 마치면 또 작은 보상을 받았다. 고등학교 다닐 땐 용돈을 벌려고 여름방학에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닦았다. 매니저가 거친 사람이라 새벽 3시까지 식당 바닥을 닦았는데, 그때 고된 육체노동을 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공부해서 전문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웃음)"

―부모에게서 받은 한국적 유산이란 뭘 말하나.

"성실과 근면, 그리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 로렌스라는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에서 성장했지만 부모님은 늘 세계를 무대로 원대한 꿈을 품으라고 하셨다."

―훌륭한 부모, 경제적 뒷받침이 전혀 없는 사람도 당신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삶의 비전과 목적이 없으면 부모를 아무리 잘 만나도 인생을 망친다. 나의 외할아버지(오정수 전 상공부 장관)는 고아였지만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셨다. 단돈 1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건너간 할아버지는 MIT공대 최초의 한국인 졸업생이 되셨다."

◆작은 걸음으로, 천천히

―'자식농사' 잘 지은 걸로 소문이 나셨더라.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 힘으로 아이 넷을 키운다는 것은 커다란 도전이었다. 결국 사회복지단체에서 일하던 아내가 둘째를 낳은 뒤 일을 그만뒀다. 아내와 나는 '팀'으로 일했다. 낮에는 아내가, 저녁시간은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내가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했다."

―학업과 놀이의 비중을 어떻게 두었나.

"초등학교 다닐 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간식을 먹인 뒤 무조건 뛰어놀게 했다. 숙제와 공부는 저녁식사 후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하도록 했다. 공부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하려고 숙제는 각자의 방, 각자의 책상에서 하게 했다. 저녁시간 TV를 보는 것은 엄격히 금했다."

―악기는 아이가 다섯 살 이전에 배우게 한다고 들었다.

"악기연습이 두뇌를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또 악기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깨닫게 하고 싶었다. 탁월함은 반복과 습관에서 온다."

―아이가 싫어할 수도 있지 않나.

"강압적으로는 안 했다. 10개의 젤리를 앞에 두고, 한 부분을 정확하게 연주할 때마다 한 개씩 먹게 해줬다. 어떤 경우든 아이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작은 걸음으로 천천히 가라. 그러면 아이의 재능이 보인다."

―자녀들 진로 선택엔 얼마나 관여하시나.

"어떤 직업을 갖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서 최고가 될 수 있도록 분투하라고 가르친다."

―경제관념은 어떻게 키워주시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needs)'과 '원하는 것(wants)'의 차이를 깨닫게 한다. 휴대폰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 아버지들은 회사 일로 바빠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이에게 낼 수 있는 시간이 하루 중 단 5분이어도 괜찮다. 그 시간만큼은 아이와 온전히 대화하고 스킨십하라.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매일 5분씩 그렇게 해라. '좋은 가족'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부모의 지혜와 헌신이 필요하다. 아내는 1년에 한 번 딸과 단둘이서만 여행을 떠난다. 사춘기를 넘기면서 같은 여성으로서 나눌 수 있는 고민과 해법이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암백신｜암 新치료법｜암을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