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지 장군(실크로드 정벌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군)처럼 중국에서 제대로 해보고 싶다"

중국 영화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동시에 한 해 외국 영화 수입을 10편 아래로 묶을 정도로 폐쇄적이다. 그런 중국 영화계가 '엽기적인 그녀'를 만든 곽재용(52) 감독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곽 감독은 중국 최대 영화사 차이나필름그룹(中國電影集團公司)의 2012년 신작 '양귀비'의 메가폰을 잡는다. 중국 자본으로 중국 본토에서 만드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한국인 감독이 연출하는 것은 처음이다.

10월 중 크랭크인 예정인 이 영화에는 곽 감독을 비롯한 촬영·조명 감독 등 한국인 스태프가 30명 가까이 참여한다. 중국 자본이 한국영화계 고급인력을 '수입'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중국 영화자본이 '한국산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세계 영화시장을 공략하려는 새로운 전략"이라며 주목하고 있다.

양귀비 역은 현재 중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고 주가를 올리는 판빙빙이 맡는다. 남자 주인공 당명황(唐明皇·현종) 역에는 저우룬파(주윤발) 등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주 서울 광화문 한 커피숍에서 곽 감독을 만났다.

―어떻게 중국에 진출하게 됐나.

"차이나필름그룹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지난해 여름 제천영화제에 찾아와 제안하더라. 아무래도 내 작품인 '엽기적인 그녀'와 '클래식'이 중국 내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비록 따오판(盜版·불법복제판)이지만 중국에서 수억명이 '엽기적인 그녀'를 봤다고 들었다."

―제작비는 얼마인가.

"1500만달러. 우리 돈으로 160억원 정도, 중국 돈으로는 1억위안이다. 극장 수익 분배나 홍보 비용을 고려하면 3억위안 가까이 벌어야 이익이 남는다. 중국에서도 이 정도면 1년에 몇편 안 찍는 대작(大作)이다."

―배우 캐스팅에도 관여했나.

"처음에 영화사에서 양귀비 후보로 판빙빙, 장쯔이, 탕웨이 등 여러 명을 얘기하며 의견을 물었다. 모두 좋은 배우이지만 판빙빙이 내가 생각하는 양귀비 이미지에 가장 가까워 선택했다. 판빙빙을 이미 몇 차례 만났는데 완전히 자세가 돼 있더라. 캐스팅 확정되고 처음 만날 땐 '(엽기적인 그녀의 주인공) 전지현보다 양귀비를 사랑해달라'고 하더라. 회의 땐 중국 역사학자를 모시고 와서 시나리오 작가와 양귀비 캐릭터에 대해 토론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캐릭터를 연구해 와서 '양귀비는 정치를 했던 여자가 아니니 나라를 망치는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만 그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중국 영화계가 왜 한국인 감독을 불렀을까.

"중국 영화는 지금 변화기에 있다. 단순히 홍콩 영화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만의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영화 장르가 홍콩에서 온 액션 사극 같은 것들 아니냐. 한국은 액션은 물론 공포영화나 로맨틱코미디도 많다. 중국엔 그런 영화를 만든 사람이 거의 없으니 당연히 한국 인력을 필요로 한다."

―여러 감독 중에서도 곽 감독을 택한 이유는.

"내 영화에서 대사의 역할이 적다는 게 장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상황과 감정, 음악만으로 호소한다. 말장난이나 이런 부분이 거의 없다. 그러니 언어가 달라도 아시아 사람이라면 '엽기적인 그녀'나 '클래식'을 좋아하는 것이다."

―결국 중국 자본의 힘이 아닐까.

"중국에서 어떤 파고(波高)가 느껴진다. 지난번엔 어떤 영화사에서 다짜고짜 '장이머우 감독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하더라. 돈이 많으니 1년에 500편씩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몇몇 감독, 제작사 말고는 돈이 없는 우리 영화계와 정반대다."

―중국 영화의 세(勢) 확장은 우리로선 경계할 일 아닌가.

"중국이 대단히 공세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충무로에 과잉 투자가 벌어지던 우리의 2005~2006년과 비슷한 느낌도 든다. 잘못하면 중국도 썰물처럼 투자가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현재 만드는 500편 중 200편이 개봉도 못 한다고 한다. 투자 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서 돈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버블(거품)이 터질 수도 있다."

―흥행 부담 등이 크겠다.

"성공 욕심이 난다. 내가 잘하면 앞으로 후배들이 중국 영화에 참여하는 선례가 될 수도 있다. 내 영화 인생을 위해서도 정말 중요한 작품이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시나리오에 한국인 장수도 있다는데.

"고선지 장군이다. 고구려 출신인데 당시 당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외국인이었다. 앞으로 중국 영화시장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할리우드에 버금가는 시장이 될 수 있다. 할리우드를 보면 어느 나라 출신이건 실력만 있으면 최고가 되지 않느냐. 나도 고선지 장군처럼 중국에서 제대로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