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내 인생] 은행 지점장서 실버 인터넷 신문편집국장 된 김진홍(67)씨

은퇴후 블로그에 글쓰다 '실버 신문'에 뛰어들어

198명 실버기자가 월급 한푼 안 받고 자원봉사

"유명 언론사가 우리 기사 받을때 정말 신납니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 명퇴했습니다. 군 복무 마치고 시중은행에 들어간 지 28년 만이었지요. 벌써 14년 전 일입니다. 3년쯤 다른 직장에 더 다니다 2000년에 완전히 은퇴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은행에 들어갔지만 제가 어려서부터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은 글쓰기였어요. 저는 서울 공항동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맏형은 일본강점기 때 징용 갔다 죽고, 그 아래 형은 6·25전쟁 통에 죽고, 누나들은 어려서 죽고…. 9남매 중에서 어른 되도록 살아남은 건 넷뿐입니다. 자식 다섯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가 막내인 저를 재우며 전우치전, 오성과 한음 이야기, 온달 장군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어린 마음에 "나도 커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요.

은행 다닐 때도 저는 숫자보다 글쓰기가 좋았습니다. 나 자신이 거대한 톱니바퀴의 아주 작은 톱날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 쓸쓸했습니다. 가장 괴로웠던 건 지점장 때입니다. 실적 올리라고 부하직원들 닦달하는 일이 제 천성에 맞지 않았거든요.

은퇴 후 첫 3년은 바빴습니다. "백수(白手)가 과로사한다"는 농담도 있잖아요. 아내(63)와 둘이서 남미와 아프리카만 빼고 안 가본 곳이 거의 없습니다. 짬짬이 국내 고적답사도 다니고요. 은행 다닐 때부터 알뜰살뜰 여행자금 저축한 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런데 놀다 보니 조금씩 허탈해졌습니다. "이렇게 살다 가는 건가?" 싶었거든요. 지금이라도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 블로그를 만들었어요. 여행기도 올리고 영화평도 띄우며 글쓰기가 손에 익어갈 무렵, 인터넷 신문 '실버넷'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07년의 일이죠.

실버넷 식구들은 '노인'이란 말을 안 씁니다. '실버'라 하지요. 실버넷은 말 그대로 실버가 무보수로 만드는 인터넷 신문입니다. 개인·기업후원자들로부터 한 해 5000만원쯤 걷어, 기자 모집·교육 비용을 충당합니다. 기자들은 한 푼도 월급을 안 받습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죠.

편집국장부터 부장·차장, 그리고 평기자까지 총 198명이 뛰고 있습니다. 왕년에 경찰관·소방관 하신 분, 정년 퇴임한 교장 선생님, 명퇴한 회사원 등 경력이 천차만별입니다. 최고령 기자는 83세이고, 최연소 기자는 55세입니다. 부장과 평기자 나이가 역전되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그 바람에 70대 평기자가 60대 부장에게 버럭 성내는 일이 간혹 발생하지요. "내 글 고치지 마세요!"

편집국은 따로 없고 전원 재택근무를 합니다. 평기자들이 각자 취재한 글을 보내면 부장·차장이 고쳐서 실버넷 사이트에 띄우죠. "우리 동네 도로표지판이 잘못돼 교통사고 위험이 있다"는 고발성 기사부터 실버 앵커가 진행하는 동영상 뉴스, 영화평, 외국어 회화 코너까지 다 있습니다.

하루 1500~2000명이 꾸준히 들어와 우리 기사를 봅니다. 신문사·방송국 기자들이 우리 사이트에서 재미난 아이템을 보고 취재 나오는 경우도 자주 있어요. 우리가 쓴 '단독기사'를 유명 언론사가 '받는' 거지요. 신납니다. 자기 기사 쓰는 것도 까다롭지만 남의 기사 고치는 건 더 힘들더군요. 평기자 거쳐 시민사회부장을 맡았던 2009년, 온종일 책상에 붙어 앉아 평기자들 기사를 손보다가 허리 디스크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그 뒤 건강하게 기자생활을 오래 하려고 걷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 집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나 한강을 따라 1~2시간 걸은 뒤, 목욕하고 아침 먹고 동네 도서관에 앉아 자료도 찾고 기사도 씁니다. 올 1월 편집국장이 됐는데, 재미있는 기사를 많이 써서 젊은이도 찾아오는 사이트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기사 많이 쓰라고 동료 기자들 닦달하느냐고요? '독려'라고 해주세요.

가끔 친구들이 "돈도 안 나오는 일을 왜 그렇게 신이 나서 하냐?"고 묻습니다. 은행 다닐 때 소설가 이문열씨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직장 그만둔 사람들이 '심심하다'고 하소연하면 그분은 이렇게 묻는답니다. "그렇게 오래 직장에 다녔는데, 직장 말고 하고 싶은 일이 그렇게도 없습니까?"

살아보니 그분 말씀이 정답입니다. 직장 다니는 동안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을 많이 만들어두세요. 우리들은 누구나 세상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일지 모릅니다. 그래도 남이 굴려서 돌아가는 톱니바퀴와 자기가 좋아서 굴러가는 톱니바퀴는 크게 다르더군요.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