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마라톤 풀코스 完走 100회에 도전한다

지금도 그날의 아득함을 잊을 수 없다. 나는 1995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춘마) 대회에 도전장을 냈으나 완주에 실패했다. '마라톤의 벽(壁)'이라는 30㎞를 채 못 가서 길가 공터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루에 한 갑 반씩 피우던 담배가 문제였다. 호흡이 가빠서 도저히 대열을 따라갈 수 없었던 것이다. 춘천 오일장 우(牛)시장에 어미 소 따라 나온 송아지가 우는 것처럼, 엉엉 울었다. 그동안 흘린 땀이 얼마인데, 고작 여기까지인가 생각하니 서러움과 자괴감이 치밀어 올라왔다.

40대 중반에 접어들던 1990년대 초, 난 심한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작은 회사에서 부장으로 승진해 부하 직원들을 거느리고 업무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이 컸던 것 같다. 가정에서도 장남으로 집안을 이끌어가느라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정신적으로 힘드니 몸도 쇠약해졌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마음먹고 시작한 게 달리기였다. 당시 살던 서울 노원구 상계동의 공원 운동장을 달렸다. 도봉산에 약수 뜨러 다니면서도 배낭을 멘 채 뛰어다녔다. 그렇게 2~3년을 연습하다가 마라톤 하프 코스를 달렸다. 내친김에 동호인 마라토너의 꿈의 무대라는 '춘마' 풀코스에 도전했다가 보기 좋게 나가떨어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도전이었다. 42.195㎞ 마라톤 풀코스를 뛸 수 있는 몸도 만들지 않고, 무턱대고 만용을 부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담배부터 끊었다. 그리고 이듬해엔 동네에서 마라톤 동호회를 만들 때 창단 멤버로 참여했다. 매주 세 차례 아침과 저녁에 모여 체계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주말엔 20㎞ 정도를 꾸준히 달렸다. 그날그날의 연습량과 부족한 점을 일지로 써갔다. 운동량이 늘어나면서 이곳저곳 쑤시던 근육이 하루가 다르게 마라톤에 적합한 근육으로 바뀌었다.

2년 뒤인 1997년, 다시 '춘마'에 도전해 첫 완주에 성공했다. 내 나이 꼭 쉰 살 때였다. 기록은 4시간 20분 52초였다.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몸이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내 마음대로 가눌 수 없었다. 그래도 해냈다는 기쁨은 컸다. 마라톤 동호회원 중 완주하지 못한 이들이 완주 메달을 빌려달라고 해서 건네주며 으쓱하기도 했다.

마라톤은 중독성이 강한 운동이다. 한번 달리는 맛에 빠지자 매년 서너 차례 이상씩 풀코스에 도전했다. 경주, 전주, 군산, 대전, 공주, 괴산, 과천, 제주도, 인천, 영주, 인제, 이천, 홍천, 원주 등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곳이면 전국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미국 보스턴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했고, 고비사막도 다녀왔다. 2008년엔 한 해 18차례나 풀코스를 완주했다. 100㎞를 뛰는 울트라 마라톤도 2번 완주했고, 강화도에서 강릉까지 308㎞를 2박 3일에 걸쳐 달리기도 했다. 이렇게 뛰다 보니, 요즘은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다음에도 몇 ㎞쯤 거뜬히 더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올해 '춘마'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몸을 만들고 있다. 이번이 14번째 참가다. 이번 도전은 나에겐 남다른 의미가 있다. 성공하면 마라톤 풀코스 100회 완주 기록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마라톤 동호회원 중엔 벌써 100회 넘게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이들도 있다. 듣자 하니, 100회 완주 기록을 가진 사람들만 참가하는 마라톤 대회도 있다고 한다.

내 최고기록은 3시간 31분 40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기록에 신경 쓰지 않는다.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기관지가 좋지 않아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지금은 1년 내내 감기에 걸리는 일이 없이 산다. 키 170㎝, 몸무게 70㎏을 유지한 지가 10년이 넘었다. 몸이 건강해지니까 정신도 맑아졌다. 늘 초조하고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살던 내가 낙천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마라톤 동호회 회장도 몇 년간 맡아 200명 가까운 회원을 이끌었다. 아내는 늘 골골하던 내가 담배를 끊고 건강을 되찾은 게 고마운지, 달리기 하느라 바깥으로 도는데도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는다. 몰라보게 달라진 내 모습을 보고 마라톤에 입문한 지인도 여럿 있다. 한 친구는 늦게 마라톤에 입문했는데, 60대로서는 대단한 기록인 3시간에 풀코스를 완주하기도 했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나이 들면 병들기 마련인데, 예순넷의 나이에도 젊은이들도 엄두를 못 내는 마라톤 풀코스를 거뜬하게 소화하니 그렇다. 달리기를 꿈꾸는 한 마라톤에 '정년'은 없다. 마라톤을 뛸 수 있는 한 내 인생에도 정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