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늙어가지만, 내 악단은 젊어지고 있어

1973년 12월 6일 영국 런던. 왕립 음악원에 갓 입학한 18세 소년이 학교를 온통 휘젓고 돌아다녔다. 지휘자가 꿈이었던 소년은 현대음악을 연주하고자 동아리를 만들고, 오케스트라를 조직해서 말러 교향곡을 연주하겠다는 거창한 계획까지 세웠다. 학교에서는 정식 허가를 받지 않은 연주회에 난색을 보였지만 그는 악단과 합창단까지 직접 섭외했고 연습 중 단원들이 마실 차까지 손수 마련했다. 30년 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에 취임한 '21세기의 카라얀' 사이먼 래틀(Simon Rattle·56)이었다.

최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래틀은 웃으며 "당시에 친구든 적이든, 협박과 설득을 가리지 않고 모두 오케스트라에 끌어들였다. 우리에게는 음악을 만들겠다는 공통의 꿈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해 말러 교향곡 2번으로 출발한 래틀의 연주회는 교향곡 4번과 6번으로 이어졌고, 영국 음악계는 이 '10대들의 음악 반란'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래틀은 10세에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주자로 입단하고 나서 15세에 처음 지휘봉을 잡았고, 25세에는 영국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전형적인 '영재 코스'를 밟았다. 하지만 그는 "지휘에도 신동은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나는 아니다. 우리는 수없는 실수를 통해서 성장하며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남미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전 세계에 클래식 음악 붐을 일으킨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31)을 "자기가 원하는 바를 동작으로 정확히 표현하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점에서 '지휘 신동'의 예로 꼽았다.

2002년 베를린 필 취임 이후 래틀은 청소년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베를린 필의 미래(Zukunft@BPhil)'와 인터넷을 통해서 음악회를 세계로 생중계하는 '디지털 콘서트' 등을 도입하면서 개혁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음악은 세상에 대한 것이며, 음악인 역시 사회로부터 격리된 섬은 아니다. 우리는 받은 만큼 되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베를린 필 역시 기존의 독일 교향악 외에도 20·21세기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현대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으며, 뒤로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앞을 내다볼 수도 있어야 한다. 현대화라는 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청중과 '소통(communication)'을 나누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 출신으로 17세에 최연소 더블베이스 주자로 입단했던 에딕손 루이즈를 비롯, 베를린 필 단원들의 연령과 국적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래틀은 "올해에도 빈 필하모닉 클라리넷 수석의 아들인 안드레아스 오텐자머가 21세 나이로 입단하는 등 젊은 단원 비중이 늘고 있다. 갈수록 그들은 젊어지고,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며 웃었다. 현재 단원들의 국적은 25개국. 그는 "베를린 필도 점차 세계 지도와 닮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평소 연주회나 리허설에서는 서글서글한 웃음을 잃지 않는 영국 신사에 가깝지만, 32세 때인 1987년에는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해달라는 카라얀의 제안을 대번 거절했을 만큼 배짱이 두둑하다. 그는 "영국 글라인드본 축제에서 고음악 연주 단체와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공연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차마 깨뜨릴 수는 없었다. 카라얀의 요청을 거절하고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한참 고민했다"고 말했다.

취임 초기에는 영국의 지휘자가 독일 명문 악단의 텃세나 문화적 장벽을 이겨낼 수 있을지 회의 섞인 전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래틀은 지난 2008년 단원 신임 투표를 거쳐서 2018년까지 '장기 집권'의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베를린 필은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민주적인 전통을 지니고 있다. 물론 내게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부권은 있겠지만…"이라며 또다시 웃었다. "21세기의 지휘자는 군림하거나 지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와 참여를 통해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리더십의 비결이 숨어 있었다.

☞사이먼 래틀은
15세에 첫 지휘봉… 10년만에 버밍엄 시교향악단 지휘자 된 영재

'영국이 낳은 21세기의 거장'으로 불린다. 2002년 9월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및 예술감독으로 취임했다. 9세 때 반바지 차림으로 아버지 손을 잡고 객석 맨 앞줄에서 말러 교향곡 8번을 듣고, 15세 때 로열 리버풀 관현악단의 타악기 주자가 된 음악 신동. 베토벤·브람스·브루크너 등 독일 고전뿐 아니라 20세기 현대음악에도 강한 면모를 보인다.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 공연=11월 15일(말러 교향곡 9번)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6일(브루크너 교향곡 9번)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02)6303-7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