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이제와서 일본과 협의하나 배상금은 다 죽고 무덤에 줄 건가"

"불쌍한 할매들 하나씩 아파서 죽을 때 정부는 뭐 하다가 인제 와서 일본하고 협의하나? 배상금은 다 죽고 나서 무덤에 줄 건가요."

일본군 성노예(종군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3) 할머니의 얼굴 주름 사이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15일 서울 세종로 외교통상부 청사 3층 면담실에서 이 할머니가 울음을 삼켜가며 빠른 경상도 사투리로 풀어내는 이야기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피해자 소송대리인 자격으로 동행한 최봉태(49) 변호사와 혜문스님이 위로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이 할머니 맞은편에 앉은 조세영(50) 동북아국장 등 외교부 당국자 3명은 묵묵히 이 할머니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날 면담은 헌법재판소가 일본군 성노예와 원폭(原爆) 피해자의 배상 문제를 둘러싼 한일(韓日) 간 분쟁을 해결하지 않는 것은 위헌(違憲)이라고 결정한 후 외교부와 피해자가 두 번째로 만난 자리였다. 지난달 31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이 헌재 판결 후 처음 외교부를 찾았을 때는 항의 서한을 전달하는 것으로 일이 마무리됐다. 외교부는 이를 고려해서 이날 면담 시간도 오후 3시부터 20분 정도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2007년 2월 미국 하원(下院)에서 사상 처음으로 열린 일본군 성노예 청문회에 나갔던 이 할머니에게 20분은 너무 짧았다. 당시 이 할머니는 "16살에 대만으로 끌려가 하루 4~5명의 일본군에게 겁탈당했다"고 증언했고, 이 증언은 미 하원이 일본군 성노예 규탄 결의를 채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92년부터 19년 동안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열었는데, 그동안 정부는 뭘 했습니까? 기어이 재판을 하고서야 그 마음을 압니까?" 이 할머니는 "오늘 (김성환 외교) 장관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제 장관이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난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이에 대해 조 국장은 연방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오늘 일본에 협의 제안도 했고, 이제 정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할머니의 '꾸지람'은 계속됐고, 오후 5시쯤에야 면담이 끝났다.

외교부는 이날 주한 일본대사관의 가네하라 노부카쓰(兼原信克) 총괄공사를 불러 이 문제에 대한 양자 협의를 공식 제안했다. 조 국장은 "군대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 배상청구권이 (1965년 체결한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서 소멸했는지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동 협정 3조에 따라 양국 간 협의를 개최하길 희망한다"는 내용을 담은 구상서를 전달했고, 가네하라 공사는 "본국에 알리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협정 3조에 따라 양자 협의를 제의한 것이 처음이고, 상대가 반드시 여기 응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이 없어 일본 측이 거부할 가능성도 크다. 외교부는 동북아국·국제법률국 등으로 이에 대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법률자문단을 만들어 지난 14일 회의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