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의 세상읽기] '프로페서 로드', 그 골목길 어느 가위맨 이야기

'프로페서 로드(Professor road)'란 길이 있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동문 옆, 이화여대 후문 건너편 골목이다. 여기서 돌 던지면 열 중 두서넛은 교수가 맞는다기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찰리정 헤어'란 간판이 그 한쪽에 있다.

주인은 정지연(鄭址淵·56), 찰리정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내다. 그는 박준·박승철과 남자 미용계의 트로이카였다. 경쟁자들은 CEO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파다. 내공을 키우려면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바뀌었다. 그해 광부였던 아버지가 사고로 탄광에 묻혔다. 거기 갇힌 지 열흘이 넘자 가족들이 초상(初喪)을 준비했다. 뜻밖의 소식이 전해진 건 그때였다. 죽었다던 아버지가 살아 돌아온 것이다.

울음바다에 웃음폭탄이 떨어졌다. 모두 기적이라 했지만 기쁨은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자다 가위눌린 듯 벌떡 일어나 괴성(怪聲)을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 광경이 매일 되풀이되자 처음엔 안타까워하던 가족들마저 진저리를 쳤다.

밥 없는 꿈은 신기루다. 한때 '저 녀석은 서울대학 갈 거야'라는 소리를 듣던 소년은 상경(上京)해 목욕탕 때밀이로 취직했다. 돈 벌어 공부하자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새벽 5시 시작한 일은 밤 11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10년쯤 그 일을 했을 때 안상교라는 선배를 만났다. 목욕탕 안에서 이발을 하던 그가 청년의 행로(行路)를 바꾸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 일 언제까지 할 거야? 앞으론 전자(電子)의 시대가 될 거야. 인천기술전문대란 곳이 있는데…."

억지로 입학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부(副)전공으로 택한 게 미용이었다. 돌이켜보면 미용과 희미한 인연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여자 동급생들은 아카시아 잎으로 파마 해달라고 그에게 조르르 달려왔다.

미용사가 되는 길은 험난했다. 목욕탕 그만두니 수입이 없어 시장에서 옷 파는 '다다구리'며 미용사가 되려는 여자들에게 머리도 맡겨봤다. 유일한 재산이 긴 머리여서 장발(長髮) 단속이 그에겐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웠다.

여자가 남자의 벽(壁) 뚫는 게 힘들다지만 그 역(逆)도 마찬가지다. 70년대 미용실은 금남(禁男)의 영역이었다. 어렵게 취직한 여의도 오로라미용실에서 청소부터 철가방 놓고 중국집 배달원 행세까지 하며 그는 가위질을 배웠다.

"세관(稅關)에서 단속을 자주 나왔어요. 외제 화장품을 들여왔으니까요. 원장님이 걱정하길래 중국집 배달원들 쓰는 철가방을 하나 갖다 놓았어요. 단속 나오면 잽싸게 화장품을 안에 넣고 나가면 의심을 안 받거든요."

그리 열심이어도 여자의 세계는 매서웠다. 공개 망신 주고 뒤로 흉보는 통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렇게 곁눈질해가며 유명 헤어 디자이너 비달사순도 거쳤다는 '샴푸 보이' 시절을 지나 파마하고 커트하는 수준으로 점점 발전해갔다.

미용업계엔 속설이 있다. '한 업소에 2년 이상 있으면 대성하지 못한다' '지방으로 빠지면 서울에서 자리 못잡는다'는 말들이다. 꾀꼬리 미용실부터 찰리정의 순례가 시작됐다. 기술 찾아 유랑, 가위맨은 방랑 검객같았다.

명동, 충무로, 남산을 종횡(縱橫)했다. 당시 후암동 샤프미용실은 호스티스의 성지(聖地)였지만 그는 과감히 뛰쳐나왔다. 그들은 하루 예쁜 머리를 원했다. 정지연은 피눈물 흘려가며 익힌 기술이 담긴 머리를 원했다.

고달픈 여정(旅程)에 한 줄기 빛이 없다면 견딜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고난투성이인 찰리정의 80년대가 그랬다. 마침 안소니 마스꼴로 같은 세계적인 헤어 디자이너들과의 쇼가 유행했고 애경 '선실크'샴푸 광고 모델로도 발탁된 것이다.

원래 유력한 후보는 박준이었다고 한다. 지명도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전이 이뤄진 건 애경의 외국인 상무 때문이었다. 그 외국인은 수염 무성한 박준의 남성미보다 여성적인 찰리정의 외모에 높은 점수를 줬다.

이렇게 질주하던 삶에 다시 제동이 걸렸다. 마침 빚 얻어 이대 앞, 영등포, 반포에 숍을 벌여놓은 상황에서 IMF가 찾아온 것이다. 한 달에 1000만원 벌면 이자로 3000만~4000만원이 나가는 상황, 쌓는 건 어렵지만 무너지는 건 순간이다.

바닥에서 올라왔다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지켜보는 사람도 슬프다. 그런데 오뚝이 같은 사내는 이달로 모든 부채를 해소하고 중국 진출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 그치지 않는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전 이 일을 정말 좋아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학력차별금지법'이 국회 처리를 앞두고 있다. 의원들이 법을 통과시키기 전에 한 우직한 사내가 걸어온 길을 들려주고 싶었다. 법 조문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는 졸업장이 아닌 인간의 눈물과 열정으로 더 두툼해졌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