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김세환 뱀장수 흉내에 연극 대기실 초토화… 공연 마친 배우들 "대사 까먹어 혼났네"
입력 : 2011.09.21 03:18 | 수정 : 2011.09.21 08:42
[23] 분위기메이커 김세환
1982년 일본 동포 사회 초청으로 공연을 갔을 때다. 송창식과 나, 김세환이 함께 갔다. 공연 다음 날 점심 즈음 일어났다. 얼마 안 돼 김세환이 밖에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으니, 쇼핑을 하고 왔다고 했다. 정작 사 들고 온 건 얼마 없었다. 의아하게 쳐다보니 그가 말했다. "일단 한번 둘러보고 온 거야. 오후에 또 가야지."
그는 나와 같이 가고 싶어했다. 송창식도 깨우려 했다. "집에서도 자는 잠을 왜 해외까지 나와서 자냐"며. 내가 "집에서 밥 먹는다고 일본에선 안 먹느냐"고 말렸지만, 김세환은 막무가내였다. 곤하게 자는 송창식 몸을 흔들어 깨우다가 맞을 뻔하곤 포기했다.
오후 두 시쯤 그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 두 시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물건 매뉴얼을 일일이 확인하고 시리얼 넘버까지 확인하는 등 한번 들어가면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내 물건 살 때도 옆에서 간섭을 많이 했다. 그때 하도 질려 혹시나 쇼핑을 같이 하게 되면 이렇게 말한다. "각자 쇼핑하고 두 시간 후에 여기서 만나자." 그러곤 나는 적당히 편안한 곳에 가 쉰다.
그의 꼼꼼함은 때로 열성으로 이어진다. 운동이 특히 그렇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스키를 타기 시작했다. 아직 스키복도 슬로프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다. 대관령에서 새끼줄 붙잡고 올라가서 스키를 탔다. 1970년대 말에는 오토바이 경주를 즐겼다. 그리고 1986년 그의 열성이 산악자전거(MTB)와 만났다. 미국에서 자전거를 사서 분해해 들여왔다. 국내 MTB 문화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20대 때 김세환의 성격은 두 단어로 규정할 수 있다. 자상함과 재치.
김세환은 3형제 중 막내다. 누나도, 여동생도 없다. 여자 스타킹만 봐도 두근거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팬들에게 무척 잘해줬다. 나와 반대였다. 예컨대 '0시의 다이얼' DJ를 맡고 있을 적 공개방송을 할 때가 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시험 스케줄을 꿰고 있었다. 진명여고 중간고사가 3일 뒤라면 방송을 시작하기 전에 말했다. "진명, 일어나 봐." 영문을 모른 채 학생들이 주뼛주뼛 일어난다. 그럼 이렇게 덧붙였다. "다 나가! 시험 공부해." 한 학생이 "저 공부 잘해요, 반장이에요"라고 대꾸하면 "반장일수록 더 정신 차려야지"라고 응대했다.
김세환의 유머 감각도 놀랍다. 그의 아버지 연극인 김동원씨는 국립극장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연으로 많이 출연했다. 연극 '햄릿'이 개막하는 날, 김세환이 인사를 하러 대기실을 찾았다. 대기실은 진지한 분위기였다. 다들 심각한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거기서 김세환이 뱀 장수 흉내로 배우들을 웃겼다. 연극이 끝나고 다들 한마디 했다. "그놈의 뱀 장수 때문에 대사 까먹어 혼났네." 그날 이후 김동원씨는 아들 김세환에게 공연 전엔 대기실에 들어오지 말라는 금족령을 내렸다.
유머와 자상함으로 젊은 시절을, 나이를 먹어가면서는 MTB에 대한 열정으로 늘 즐겁게 살아온 김세환이지만 그에게도 뼈저린 경험이 있다.
1991년 김세환은 서울 역삼동에 '모리스시'란 일식당을 차렸다. 주방장을 비롯해 L호텔 주방 팀을 통째로 데려왔다. 당연히 돈이 많이 들었다. 매일 아침엔 신선한 횟감을 구하러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출근했다. 워낙 아는 사람이 많았으니 처음엔 손님이 많았지만 늘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유지비가 줄어든 건 아니었다. 김세환은 애가 탔다.
당혹스러운 일도 겪었다. 모리스시 주변으로 모텔이 많았다. 어느 날 바로 옆 모텔에서 연락이 왔다. 모리스시에서 굽는 생선 냄새가 다 자기 쪽으로 몰려와 손님들의 불평이 많으니 이야기 좀 하자는 것이었다. 정작 모텔에 찾아가자 카운터엔 직원만 지키고 있었다. 직원이 말했다. "사장님께서 좀 있다 오시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사장 대신 체크아웃하고 나가는 손님들만 카운터 앞을 지나갔다. 대부분 김세환을 유심히 쳐다보고 갔다. 그는 조마조마했다. '아, 대낮에 오해받겠네. 식당 일 때문에 온 건데.' 창피해서 얼굴이 발개진 채로 한참을 거기 서 있다 왔다고 후에 김세환이 말해줬다.
혹독한 인생 경험은 4년 만에 끝이 났다. 일식당을 그만두는 날 그가 말했다. "다시는 이쪽 보고 오줌도 누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