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62] 축음기는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자 "치안 방해물"

1934년 12월 23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한 노총각이 '예비 장모'를 폭행한 사건이 대서특필됐다. 장모 될 사람이 "딸을 못 주겠다"며 파혼을 선언하자 격분한 노총각이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 결격 사유가 특별했다. 노총각의 집안에 축음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축음기를 '방탕한 자의 사치품'이라고 여긴 어르신은 "이런 것을 보면… 신랑될 사람은 방탕자인 것을 알 수가 잇다"고 단정한 것이다. 노총각은 "장차 건설할 신(新)가정을 위한 준비공작"으로 일부러 축음기를 사다 놓았다가 혼담이 깨지는 아픔을 맛봤다.

80여년 전 축음기는 "이십세기 문화의 가장 찬란한 한 부문"(1938년 7월 1일자)이었지만, 상당수 사람들에게는 저속한 유행가를 듣는 사치품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1980년대에 VCR이 '성인 비디오 감상 도구'처럼 받아들여진 것과 비슷하다.

구한말에 상륙한 축음기는 1930년대 중반엔 약 30만대를 넘어섰지만, 서민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비싼 건 한 대에 수백원(수백만원)이나 됐다. 때문에 서민들은 시내 본정통(本町通·충무로) 악기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축음기 소리를 감상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게 뜻밖의 문제를 일으켰다. 유행가 소리에 많을 땐 백여명의 행인들이 모여드니 통행까지 방해하게 된 것이다. 경찰은 악기점 주인들을 불러 "대로(大路)에 통행인을 세워두는 것은 절대로 안 되니 정리하라"고 경고했다. "본정통에서는 류행가나 쨔쓰를 듯지 못하게"된 것이다.(1932년 2월 13일자)

축음기 보급 초기인 1920년대엔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선물로 축음기들이 전달됐다. 체신국은 20여곳의 국경우편국 직원들에게 유성기를 배부했고(1921년 9월 17일자) 경기도 부천군은 농부들이 신농가(新農歌)를 들으며 김을 매라며 축음기를 농촌에 나눠줬다. (1924년 11월 27일자) 1933년 서대문 형무소는 "축음기로서 구백여명의 재감자들에게 노래와 강연을 듯겨 주기로 하얏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다만 "련애(戀愛)의 의미를 포함한 것과 비장(悲壯)한 것은 재감인들에게 도리혀 번민과 우울을 줄 념녀가 잇슴으로 이것을 피한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1934년 5월 12일자) 실제 연주 대신 축음기를 틀어주는 음악회도 1930년 전후에 자주 열려 인기를 끌었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축음기는 제조 금지됐지만 축음기 듣는 맛을 안 사람들의 욕망은 식지 않았다. "시내의 중고품 축음기가 동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38년 11월 2일자) 전시체제에서도 조선 땅에서의 음반 판매량은 "내지(內地·일본)의 대도시에 지지 안흐리만치" 많았다.(1938년 10월 9일자) 이렇게 축음기는 애호와 비판의 엇갈린 시선을 받았던 당대의 핫 아이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