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그를 뽑으면 인간다운 삶이 펼쳐집니다"

"공기청정기 회사 대표로 한국에 왔을 땐, 사람들 표정이 화난 것처럼 보이고 하늘이 참 탁했어요. 16년 만에 와 보니 서울 공기는 훨씬 맑아졌고, 사람들 얼굴에도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하얀 수염이 덥수룩하지만 얼굴빛이 맑은 초로(初老)의 신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지무라 야스유키(藤村靖之·67·사진)씨는 발명가다. 1973년 일본 오사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딴 그는 지금까지 1000여개에 달하는 제품을 발명했다. 그가 1984년 대기업 연구소를 나와 발명가가 된 것은 천식을 앓고 있는 아들에게 줄 공기청정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후지무라씨는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는 제품을 만든다. '간쿄(環境) 이온식 공기청정기'는 1995년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어 250만대가 넘게 팔렸다. 매출 규모 1255억엔, 한화로 치면 1조8900억여원이다. 2000년부터는 아프리카·남미·중앙아시아 등 20여 개국에서 영감을 얻어 '비전력(非電力)' 제품 30여종을 발명하기 시작했다.

후지무라씨는 지난 20일 에너지시민연대, 고용노동부 등의 주최로 '에너지 위기극복' '정전사태의 원인과 대책'을 논하는 4차례의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그는 "3월 일본 지진 이후 더욱 큰 관심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전기 절약'이 일본의 큰 사회 이슈로 떠오르면서 하루에 2건 이상 강연을 하고 있다. 저서 '플러그를 뽑으면 지구가 아름답다'는 두 달 전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됐다. "15일 한국에서 정전 사태가 일어난 것은 어쩌면 좋은 기회입니다. 일본에서는 대지진과 원자력 발전소 붕괴라는 참상을 겪고서야 깨달았어요. 다른 것보다 전기를 쓰는 문화 자체를 바꿔야 해요."

그는 4년 전 가나가와현의 한 바닷가 2.5㏊(약 7500여평) 땅에 '비전력 테마파크'를 지었다. 여기에는 직접 발명한 '비전력 냉장고, 세탁기, 시계' 등과 '열병합형 소형발전장치'를 개발하는 공방이 있다. 대표작인 비전력 냉장고는 열전도율이 높은 금속 저장고 주변을 물로 채운 뒤 방열판으로 겉을 싼 상자다. 내부의 열을 뽑아주고 바깥 열은 차단되는 원리로 한여름에도 7~8도를 유지한다.

후지무라씨는 "이 냉장고가 소개되자 홋카이도 사람들이 '겨울이면 천지가 눈으로 뒤덮이는 추운 지역에서 전기냉장고를 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며 무더기로 주문을 했다"고 말했다.

후쿠시마와 95㎞ 떨어져 있는 바닷가 마을 '비전력 공방'에는 지진이 있은 후 아기 엄마들이 찾아와 "모유를 먹이고 싶은데 두렵다"며 울었다. 후지무라씨는 "아기 엄마들이 3주간 먹은 음식의 방사능 피폭량을 계산해 알려주는 수밖에 없었다"며 "일본 사회에는 전기를 이대로 펑펑 쓰다가는 더 불행한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개발한 번쩍이는 태양열 조리기로는 계란 프라이를 부치는 데에도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비전력 냉장고는 전기제품에 비해 성능이 크게 떨어진다. 후지무라씨는 "이런 종류의 불편함은 인간다운 것이고 낭만적인 일"이라며 "지난 10년간 '비전력'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 비전력(非電力)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뜻함. 후지무라 야스유키씨는 “몸을 직접 움직여야 하고 성능이 좀 떨어져도 빗자루나 압력솥 같은 비전력 제품을 쓰는 게 건강과 환경에 좋다”고 주장한다. 발명가인 후지무라씨는 전기 없이 쓸 수 있는 냉장고, 청소기, 음식물 쓰레기 건조기, 커피 로스터 등 30여종의 비전력 제품을 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