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아빠 위해 매일 깃발 올리는 소녀… 그리고, 그 소녀를 사랑한 소년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끄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명가(名家) 지브리 스튜디오의 신작이다. 그간 지브리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환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험담을 주로 그렸지만, 이번 작품에선 현실에 실제 있었을 법한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를 다뤘다.

배경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한 해 앞둔 1963년의 도쿄 부근 어느 소도시.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외할머니를 도와 하숙집을 운영하는 열여섯 소녀 '우미'가 주인공이다. 뱃사람이던 아버지는 6·25전쟁 때 물자운반선에 탔다가 배가 침몰해 실종됐고, 어머니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하숙집 식구들의 아침과 점심 도시락을 만드는 건 우미의 몫이다. 우미는 "깃발을 걸어놓으면 아빠가 길 잃지 않고 집에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매일 바다를 향해 깃발을 올린다.

그 깃발을 매일 아침 보는 건 열일곱 소년 '?'이다. 그는 자신이 만드는 학교신문에 "소녀여, 그대는 깃발을 올린다"는 시구를 싣는다. 마침 학생회관 '카르티에 라탱'의 철거 반대 시위를 벌이던 ?이 점심을 먹던 우미와 마주하게 되고, 우미가 철거 반대 운동에 동참하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소녀, 소년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인데도 유독 올림픽을 앞둔 시대 분위기가 눈에 띈다. 영화 속 일본 사회엔 "낡은 것을 모두 부수고 새것으로 바꾸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도심엔 '아름다운 도쿄에서 올림픽을 성공시키자'는 표어가 붙어 있고, 남학생들은 학생회관에서 새 사회 건설에 대해 토론한다.

반면 주인공들은 옛것에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우미와 ?은 각자 아버지의 옛 사진을 간직하고 있고, 낡은 '카르티에 라탱'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을 모아 깨끗하게 청소한다. 우미는 매일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깃발을 올린다. 시대와 인물의 상반된 분위기가 영화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된다.

이제는 제작자로 물러난 미야자키 하야오는 "새 시대의 막이 열리면서 무언가를 잃으려 하던 때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는 곧 현재 일본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대지진이 많은 인명과 일상을 앗아갔고 이를 복구하는 일이 주어졌다. 1963년엔 희망이 더 컸지만, 지금은 절망의 그림자가 더 짙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감독을 맡았다. 장남의 첫 애니메이션 '게드전기' 시사회에서 작품에 실망해 상영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아버지는 이번 시사회에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원제 'コクリコ坂から'. 91분. 12세 이상 관람가.

[이것이 포인트]

#장면
?이 모는 자전거 뒤에 올라타고 시장에 가는 우미. 마을 골목길과 옛 시장의 풍경은 최신 3D 기술보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따뜻한 2D 그림체로 볼 때 훨씬 아름답다.

#대사
"꼭 막장 드라마 같아."(영화 중반 서로 사랑을 느끼는 ?과 우미. 그러나 '출생의 비밀'로 엮이게 되자 ?이 내뱉는 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종전 후라는 배경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런 분들 보세요
고교 시절 첫사랑의 추억을 다시 느끼고 싶은 어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