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위내 4곳이 영업정지… 큰 저축은행이 더 위험

서울에 사는 최모(77)씨는 지난 7월 제일저축은행에 예금을 넣었다. 금융 당국이 하반기 구조조정을 통해 추가로 부실 저축은행을 퇴출한다고 발표한 직후였다. 최씨는 '큰 곳이 안전하겠지' 하는 생각에 집 근처 중소형 저축은행 대신 일부러 규모가 큰 제일저축은행(업계 3위)을 찾았다. 하지만 지난 18일 제일저축은행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고 문을 닫았다. 예금이 묶인 최씨는 "크면 안전할 줄 알았는데 판단을 잘못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문 닫은 16개 업체 중 11개가 상위 30위 이내

올 들어 16개 저축은행이 영업정지되는 과정에서 '큰 곳이 안전하다'는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난해 12월 기준 자산 규모로 1~5위인 대형 저축은행 중 1위 솔로몬만 제외하고 2~5위인 토마토·제일·부산·부산2저축은행이 모두 문을 닫았다. 이 4곳을 포함해 퇴출된 16곳 중 11곳이 전체 105개 업체 중 30위 이내에 들었다.

게다가 영업정지 후보 명단에 올랐다가 자구 계획이 통과돼 살아남은 저축은행 6곳 중 5곳이 상위 20위 안에 드는 것으로 전해졌다. 저축은행업계만 유독 큰 곳이 더 위험하다는 역설이 생길 법한 상황이다.

금융계 인사들은 대형 저축은행들이 한 건당 수백억~수천억원의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에 집중 투자를 했다가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면서 결정타를 맞았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작은 저축은행들은 여력이 안 돼 계속 서민 대출에 주력했지만 대형 저축은행들은 '큰 것 한 방'을 터뜨리기 위해 부동산 사업에 주력했다"고 말했다. 수조원대의 예금을 굴릴 곳이 마땅치 않아 대출 건수를 줄이고 대신 한 건당 대출액을 늘렸다는 것이다.

인력이 부족한 것도 이런 방식의 영업을 계속한 이유였다. 토마토저축은행은 업계 2위 대형 업체이고 한때 자산이 4조원대였지만 임직원은 불과 211명이다. 금융지주의 한 임원은 "저축은행들이 거시경제 상황을 예측하거나 체계적인 여신 심사를 하는 전문 금융인이 없이 사채업 하듯 회사를 운영한다"고 지적했다.

◆전문 인력 없이 대주주의 '동물적 육감'에 의지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동산 경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든 이후에도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부동산 PF 대출에 집착했다. 저축은행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백억원대 PF 대출을 할 때 대주주가 '동물적인 육감'에 의지해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며 "순전히 운에 좌우된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들은 대형 저축은행이 건실한 영업을 통해 차분하게 덩치를 키운 것이 아니고, 대형 건설사업을 통해 갑자기 떼돈을 벌어 성장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고층빌딩을 한두 달 만에 세운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며 "크다는 게 오히려 독(毒)이 될 수도 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지금은 1~10위 저축은행이 모두 자산 2조원 이상이지만 2003년만 하더라도 자산 2조원 이상은 한 곳도 없었다. 2000년대 들어 신용금고 대신 저축은행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면서 신뢰성을 높인 것도 영업 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대형 저축은행과 달리 중소형 저축은행이 7~8월 경영 진단 결과 대부분 우량한 것으로 드러나 대조를 이루고 있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부동산 대출 대신 본래 사명대로 서민 금융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한 중소형 저축은행의 경영지표가 우량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