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4.0] "내 성공 도와준 우리사회의 안정·건강 위해 기부합니다"

격무였다. 항상 통금 직전 막차를 탔다. 꾸벅꾸벅 졸다 집앞에 내리면 사방이 캄캄하고 먼데서 컹컹 개가 짖었다. 서울 방학동이 허허벌판이던 시절 골목 끝 농가에 병든 아버지, 그릇 행상에 나선 어머니, 학교 다니는 동생 네 명이 새우처럼 오그리고 자고 있었다.

한때 서울 혜화동의 방 다섯개짜리 단독주택에 보모 두고 살았던 기억이 꿈만 같았다. 아버지가 몸져누운 뒤 거짓말처럼 집안이 기울어 혜화동에서 서울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를 거듭해온 뒤끝이었다.

"그때가 1971년, ROTC 중위로 막 전역해 삼일회계법인에 입사한 해였습니다. 돈 버는 사람은 나 하나였죠. '과연 내 힘으로 우리 집을 일으킬 수 있을까?' 싶었지요. 막막하고 고단해 골목을 걷다 소리 내 운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절망은 하지 않았어요."

김일섭(65) 한국형경영연구원장은 서울대 재학 중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삼일회계법인 부회장, 이화여대 부총장,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회장을 거쳐 올해 자기 연구원을 차렸다. 나중에 이렇게 성공할 줄 젊은 날엔 몰랐다. 그러나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만큼은 버린 적이 없었고, "희망을 놓지 않은 나를 사회가 도워줬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부를 시작하게 됐다. 37년 전인 1974년부터다.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49명 중 한 명인 김 원장은 '자본주의 4.0' 시대에 왜 기부가 더 필요한지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세상에서 돈 버는 방법은 두 가지, '거래'와 '투자'입니다. 가령 빌 게이츠 재산 중에 윈도 제품 판매해서 번 돈은 거래로 번 돈, 즉 일해서 번 돈입니다. 반면 주가가 뛰어서 번 돈은 투자로 번 돈, 즉 돈이 돈을 번 돈이죠.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큰 부자는 투자로 나오지 거래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투자로 번 돈은 일정 부분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안 그러면 우리 사회가 불안해지고, 사회가 불안해지면 결과적으로 부자도 살기가 나빠진다는 얘기였다.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 직업과 생활이 불안한 사람들이 미워할 대상을 찾게 됩니다.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가 '나는 내가 가진 부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인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투자로 큰돈을 번 사람들이 솔선해서 기부해야 사회 전체가 더 건강해져서 그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더 행복해진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은 정부 주도하에 압축 성장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현대' 하면 정주영, '삼성' 하면 이건희 하는 식으로 기업을 의인화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총수들도 '이 기업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총수도, 기업도 사회의 일부입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갈수록 파워가 대기업과 총수에게 쏠리는데, 대기업과 총수에게도 좋을 게 없습니다."

김 원장은 직장생활 4년차이던 1974년부터 기부를 시작했다. 없는 집에 시집 와서 고생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내가 뭔가 당신에게 해줄 게 없느냐"고 물었는데, 뜻밖에 아내는 "내가 알뜰하게 살림할 테니 (수입의 일부를) 좋은 일에 쓰며 살자"고 한 것이다.

그는 2년 전 "집안이 어려운 예·체능 전공 청소년들을 위해 써달라"면서 아너소사이어티에 1억원을 냈다. "공부가 가장 일반적인 사다리인데, 공부해서 대학 가는 아이들은 장학금 주는 사람이 많으니까 저는 별로 돌보는 사람이 없는 예·체능을 고른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4.0

자유방임의 고전자본주의(1.0), 1930년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수정자본주의(2.0), 1970년대 시장의 자율을 강조한 신자유주의(3.0)에 이어 네 번째 자본주의라는 뜻.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고 성공한 사람이 더 큰 성공으로 나아가도록 장려하되, 낙오한 사람들을 북돋우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기부는 '따뜻한 자본주의'인 자본주의 4.0의 중요한 요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