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4.0] 고생해봤기에 가난 방치하면 사회 무너진다는 것 알아

복지단체 사람들은 박 회장 같은 고액 기부자를 '파란만장'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가난 속에서 독하게 일해 파란만장한 세월 끝에 '파란 돈(1만원권)' 수만장을 냈다는 뜻이다.

국내 유일의 개인 고액(1억원 이상) 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는 이런 사람들이 모인 집결지 같았다. 섬에서 유복자로 자란 박점식(56) 천지세무법인 회장, 부산 달동네 미용실 뒷방에서 무학 어머니 손에 자란 안진공(48) 김해미치과 원장, 마흔 넘도록 막노동한 이금식(67) 경암문화장학재단 이사장….

취재팀이 국내 유일의 개인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49명을 전수(全數) 조사해 그들의 인생행로를 분석해보니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첫 번째는 대다수가 부모 도움 없이 혹독한 가난을 딛고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세월 끝에 부자가 됐다(36명·78%)는 점이고, 두 번째는 기부 할지 말지를 부인 등 주변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결단을 했다(27명·58%)는 점이다. 1억원을 기부하면서 1000원 쓸 땐 벌벌 떠는 '자린고비'들도 많았다(24%). 이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하면 '한국형 고액 기부자'의 초상(肖像)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자본주의 2.0 시대)과 무한경쟁(자본주의 3.0 시대) 단계를 온몸으로 헤쳐나오며 과실을 땄고, 이제 그것을 뒤처진 사람과 나누려는 자본주의 4.0 시대의 개척자들이다.

박순호(65) 세정그룹 회장은 산 높고 들 좁은 경남 함안군 산골에서 자랐다. 중학교를 마치고 마산으로 뛰었다.

"6·25 때 국군과 인민군이 번갈아 들이닥쳐 계곡물에 핏물이 벌겋게 흘렀습디다. 쌀밥은 1년에 몇 번 구경하기 힘들고 주로 고구마와 보리죽으로 묵고 사는데 공부는 언감생심. 중학교 졸업도 감지덕지요. '마 나는 공부도 됐고 돈 쫌 한번 원 없이 벌고 싶다' 마음묵었소."

새벽에 신문 돌리고 낮 동안 메리야스 도매상에서 일했다. 저녁 때 야학 가고 밤에 주산(주판셈)을 독학했다. 28세 때 부산 변두리에 공장(132㎡·40평)을 차리고 환편직기 4대와 미싱 9대를 놓았다. 그 공장이 10여개 패션 브랜드를 거느린 연 매출 9500억원의 세정그룹이 됐다. 대표 브랜드는 양복 전문 '인디안'이다. 의류 사업 말고 혼(魂)을 기울인 유일한 사업이 '기부'였다. 개인 돈 1억원 이상 기부한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가운데 평생 기부한 금액이 가장 많은 사람이 박 회장(120억원 이상)이다.

아너소사이어티 회원들에게서 나온 기부금엔 남다른 어려움과 그 역경에서 얻어진 기부 정신이 배어 있다. 부하 직원은 "시즌마다 신상품이 5000벌 넘게 나오는데 메리야스 등 속옷 계열만 빼고 회장님이 일일이 입어보고 만져본다"고 했다. '단추와 단추 사이 몇 ㎝ 거리를 뒀나'까지 살펴보고 마음에 안 들면 호통을 친다는 것이다.

그는 "피 같은 돈이지만…. (이웃이) 어려운 거 아니까 기부한다"고 했다.

박 회장은 38세 때 아내 손에 이끌려 장애인 복지시설 '오순절평화의마을'을 찾았다. 이후 30년 가까이 철마다 옷과 음식과 현금을 들고 부산 일대 복지시설을 돌았다. 앞으로 복지사업을 더 많이 하려고 지난 5월 사재를 털어 '세정나눔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독거노인들에게 옷 보낼 때도 물건만 보내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직원들 이끌고 달동네를 골목골목 돌아다닌다.

"내가 못살았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더 목마른 사람, 더 간절한 사람한테 가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참상(慘狀)을 눈으로 봐야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자꾸 더 들지, 남이 어떻게 사는지 안 보면 점점 현실을 모르게 됩니다."

그는 "옛날엔 다 가난했지만, 경제가 발전하면 먹고살기는 나아지는 대신 빈부격차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격차를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기부한다고 했다. "돈 벌어 지 혼자 맛있는 거 사 묵는 데 급급해 인생이 그렇게 끝나면 얼마나 허망합니까? 회사 규모를 10억, 20억 불리는 것도 재미있지만 없는 사람 손 붙들고 내가 가진 재물을 나눌 때 더 사는 맛 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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