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도 놀랐다… 작품에 한 번, 재료에 또 한 번

상감 문양이 아름다운 중국 도자기, 고대 그리스의 여신(女神)상, 금박을 입힌 불좌상(佛坐像)…. 지난 2월 중순 런던의 메이저 갤러리 헌치 오브 베니슨(Haunch of Venison)의 여섯 개 전시장이 동·서양의 유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들 유물은 진품이 아니라 한국 조각가 신미경(41)이 만든 복제품 300여점이었다. 굴지의 경매회사 크리스티 소유인 헌치 오브 베니슨에 젊은 한국 작가가 입성(入城), '크리스티가 주목하는 작가'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은 런던 미술계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관객들은 또 이 정교한 작품들의 재료에 한 번 더 놀랐다. 재료는 비누였다.

"비누란 사람들이 '존재를 보면서도 부재를 느끼는 재료'예요. 유물이란 귀중한 거니까 영구불변하는 재료로 만들어져야 한다고들 생각하는데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르는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 마음속에서 실제보다 더 나약해지는 거죠. 그러나 사실 대리석도 영구하진 않아요. 풍화 속도가 비누보다 느릴 뿐이죠."

신미경은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5년 영국 런던대학 슬레이드 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대영박물관에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유물을 만난 것이 '비누 조각'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그리스의 강렬한 햇살을 떠나 어두침침한 박물관 조명 아래 맥락 없이 놓여 있던 유물들은 견고한 대리석이 아니라 닳고 닳은 비누조각처럼 맥없이 느껴졌다. "그리스 유물의 처지가 낯선 런던에서 고군분투하는 저 자신처럼 여겨졌죠."

1998년 졸업 전시회에서 신미경은 학교 복도에 있던 19세기 이탈리아 작가의 비너스상을 바로 옆에서 비누로 모각(模刻)했다. 당연히 현지인들은 호기심 어린 반응을 보였다. "'넌 도대체 어디서 이런 기술을 배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사실 그 작품은 그들에겐 '고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겐 '컨템포러리(contemporary)'였어요. 한국에서 미대 조소과에 입시를 준비하면 서양 석고상을 3시간 내에 흙으로 복제하는 훈련을 받거든요.(웃음)"

공들인 손맛보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개념미술 작품이 미술계의 주류였지만 신미경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시류에 흔들리지 말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다. "공들여 조각을 하면 유행에 뒤떨어진 게 되고, 작가가 아닌 '장인(匠人)' 취급을 받게 되는 세태에 대한 의문이 있었어요. 저는 과거의 미술가들처럼 공을 많이 들여 작업하면서 현대적 맥락에서도 의미를 가지는 작품을 하고 싶었죠."

그 후로 그는 줄곧 비누로 옛날 유물들을 본뜨는 작업을 해 왔다. 그리스 조각상에서 시작해 이후에는 불상, 중국·한국 도자기 등으로 범위를 넓혀갔다. 모든 작품의 제목은 'Translation(번역)'. 흙이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원래의 유물을 '비누'라는 다른 조형 언어로 '번역'했다는 뜻이다. 초기엔 비누 가루를 반죽해 소조(塑造) 작업을 주로 했지만 요즘엔 유물을 실리콘으로 본뜬 틀에 녹인 비누액을 부어 굳히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한 해에 쓰는 비누만 10t가량. 재료로 쓰는 비누는 원래 향이 없지만, 비누액에 재스민, 일랑일랑 등의 향료를 넣어 작품에서는 향기가 나도록 한다. "오리지널 유물과 제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향기'예요. 관객들이 작품을 직접 '체험'했다는 느낌을 갖도록 하고, 오래도록 기억되도록 하고 싶어서 향기를 넣기 시작했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3월 25일 '금주의 아티스트'로 신미경을 지목했다. 영국의 권위있는 미술잡지 프리즈(Frieze)는 신미경 개인전을 이렇게 평했다. "신미경은 덧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영원의 이미지를 설정, 물로 씻겨 사라질 수 있는 대형 전시회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조각들보다 오래 존속할 것인가?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11월 12일까지 서울 서초동 아트클럽 1563에서 열리는 신미경 개인전 'Translation'에 그의 작품 100여점이 나온다. (02)585-5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