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락장에서 '팔아라' 외치지 못하는 증권사들

지난 8월 이후 코스피지수가 20% 이상 하락하는 동안 국내 증권사 애널리스트(증시분석가)들이 낸 보고서(총 2435건) 중 '주식을 팔라'고 권한 보고서는 단 한 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2년 만에 처음 등장한 '셀(sell·매도) 리포트'였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의뢰해 2008년 이후 39개 증권사가 발표한 종목 보고서 8만여건을 분석한 결과, '셀 리포트'는 2009년에 2건, 이번 달에 1건으로 3년간 총 3건에 불과했다. '매도' 의견보다 한 단계 낮은 '비중 축소' 의견 역시 105건에 그쳤다. 대다수인 84%는 '바이(buy·매수)' 리포트였고, '중립' 의견은 11%였다. 애널리스트들이 해당 기업이나 그 종목을 보유한 기관투자자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국내 증권가 현실이 반영된 결과다.

◆'중립' 의견이 사실상 '매도'의견

2년 만의 '매도 의견'은 지난 8일 HMC투자증권에서 나왔다. 매도 권유 대상은 최근 1조4000억원대 대규모 유상증자를 결정한 대우증권이었다. 매도 의견은 대우증권의 유상증자 발표 직후 나왔다. 대우증권은 유상증자 발표 직후 하한가로 직행했고, 현재(9월 29일 기준)까지 주가가 25% 하락했다. 리포트를 낸 박윤영 연구원은 "향후 수익률이 마이너스 20~30%로 추정돼 목표주가를 낮추고 매도 의견을 냈다"고 말했다.

유상증자로 인한 주가 하락은 예상 가능한 상황으로 '매도 의견'을 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증권업계에선 이마저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경력 15년차의 한 애널리스트는 "부정적 의견을 내면 해당 기업이 기업탐방을 막거나 정보 접근을 제한하는 경우가 있고, 그 종목을 보유한 기관투자자들이 증권사와 거래를 축소하는 등 압박을 하기 때문에 매도의견을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라며 "과거 매도 의견을 냈다가 해당 기업으로부터 소송하겠다는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애널리스트들은 특정 기업 주식에 대해 '중립'의견을 가장 부정적인 의견으로 활용한다. 증권가에서 '중립' 의견은 곧 '알아서 판단해 팔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 '매수' 의견은 유지하면서, 목표주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종목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20년차 한 애널리스트는 "요즘 같은 폭락장 후에 한 달 전 제시했던 목표주가를 절반으로 깎아내리는 것도 쉽지가 않다"며 "한 달 만에 자기 논리를 뒤집는 새로운 논리를 내세운다는 것도 민망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하락장에선 애널리스트들의 리포트가 대폭 감소한다. 올해 1월 2600건이 넘던 리포트는 8월에 1553건, 9월에는 882건(28일 기준)으로 줄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주가가 고꾸라졌던 2008년 6월에도 보고서 숫자가 900건으로 줄었었다. 증시 호황이었던 2009~2010년에는 월평균 1900~2100건의 보고서가 나왔다.

◆매도 의견, 대체로 적중

2009년 이후 3번 등장한 '매도' 의견과 올해 4번 등장한 '비중축소' 의견을 살펴보니 대부분 주가 예측이 적중했다. 'LG생명과학'에 대한 비중축소 의견을 낸 김지현 키움증권 연구원은 8월 1일 이 종목 주가가 5만원대로 승승장구할 때 팔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김지현 연구원은 "마진이 적은 사업에 과도한 연구비용이 투입되는 등 영업의 질이 나빠져 비중축소 의견을 냈다"고 말했다. 이 종목의 주가는 이후 3만원대로 하락했다.

반대로 매도 추천 이후 오히려 주가가 상승한 사례도 있었다. 2009년 5월 메리츠종금증권은 '다음'에 대한 매도 의견을 냈다. 8만9000원까지 갔던 주가가 3만원대로 추락한 뒤 살짝 반등하던 시기에 나왔는데, 주가는 계속 승승장구해 현재 13만원대까지 올라와 있다. 해당 연구원은 그해 실적전망치에 따라 산정한 적정주가가 현저히 낮다는 이유를 제시했는데, 예측이 틀리긴 했지만 용기에는 박수를 보내줄 만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눈길을 끄는 점은 부정적 의견을 낸 애널리스트 총 6명(1명이 2건의 비중축소 의견을 냄) 중 여성이 2명이라는 것이다. 여성 애널리스트 수가 전체 애널리스트 1500여명 중 360여명(24%)에 불과하고 주로 보조연구원 지위라는 점을 감안하면 특이한 점이다. 2009년 5월 삼성증권의 한 여성 연구원은 '금호타이어'에 대한 매도의견을 냈는데, 이후 이 종목 주가는 30% 이상(9월 29일 기준) 하락했다. 지난 1월 KTB투자증권의 한 여성 연구원은 주가가 8만원대였던 '한미약품'에 대한 비중축소 의견을 냈는데, 이 종목은 현재 6만원대에 머물고 있다. 해당 연구원은 "기업 가치를 평가한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반영했을 뿐이고 다른 사항은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