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돈 만드는 기술자' 김상민 조폐공사 인쇄부장

―당시 첫 월급은?

"6만원 정도로 기억이 난다. 첫 월급을 어머님께 드리니, '너를 대학에 못 보내줘 미안하다'고 우셨다. 또 학교 졸업 전이라 선생님께도 조그만 선물을 했다. '너 급여가 나와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며 좋은 직장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급여가 통장으로 입금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만든 빳빳한 신권으로 수령을 했다.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줄 때 생색도 냈는데 요즘은 모두 통장으로 입금이 돼 그런 재미가 없어진 게 아쉽다."

―김 부장은 요판(볼록)인쇄 전문이라는데, 지폐를 만들 때 요판 인쇄 과정이 왜 필요한가?

"신권의 경우 까칠까칠하게 만져지는 부분이 요판인쇄에 의한 것이다. 강한 열과 압력이 필요하다. 이런 인쇄 방식은 위조지폐 방지를 위한 것이다. 일반 인쇄업체에서는 요판인쇄를 하지 않는다. 인쇄기 외에 별도의 부대시설이 필요해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때 찍은 지폐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지금은 제품(돈) 보관창고가 자동화돼 컴퓨터로 입출고가 처리된다. 눈으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시에는 운반수레에 지폐 전지 1만장(무게 600㎏)씩 창고로 실어 날랐다. 조폐공사는 계수(計數)가 생명인데, 그때는 화폐 전지도 손으로 셌다. 숙달된 선배들은 1만장을 40분 안에 다 셌다. 보관 창고에는 2인 1조가 아니면 출입이 제한됐다. 출입 시마다 시간과 이름을 적고 서명했다. 창고 안에는 지폐 건조를 위해 열풍(熱風)을 불어넣는데, 그 특유의 냄새도 향기롭지는 못했다."

―특유의 냄새라니?

"잉크 냄새에다 사우나 안처럼 습한 열기가 뒤섞인 것인데…."

―돈냄새라는 게 있는가?

"지금은 지폐가 만들어지면서 공기와 접촉해 자연 건조된다. 이 속에서 일하지만, 돈에 특별히 냄새가 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오히려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향기로울 수도 악취가 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지폐 제조용 잉크는 특수한가?

"특수한 안료가 포함된 잉크가 대부분이다. 입사할 때만 해도 요판인쇄 후 잉크가 마르지 않아 화폐 전지 사이사이에 종이(간지)를 한 장씩 삽입했다. 1989년 말부터 그렇게 묻어나지 않는 잉크가 개발됐다. 지금 유통되는 은행권이 생산되기 전(2005년)까지는 잉크는 모두 자체 생산했다. 하지만 잉크에도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얼마나 들었느냐 등을 따지게 됐다. 지금은 스위스 시그파사의 모듈 잉크(반제품)를 구입해 공정을 한 번 더 거쳐 사용하고 있다. 5만원권의 경우는 잉크를 자체 개발했다."

―지폐 용지는 무엇을 쓰나? 천원, 만원, 오만원권이 동일한가?

"은행권의 용지는 목화면 100%로 제조되고 있다. 과거에는 미국산·중국산을 수입해 썼다. 요즘은 우즈베키스탄에 면펄프 자회사를 설립해 그곳에서 면펄프를 공급받아 충남 부여에 있는 제지본부에서 용지를 만든다. 두께, 평활도, 내절도(접고 폈다 했을 때 끊어지는 정도) 등 한국은행의 요구 기준에 맞춰야 한다."

조폐공사는 은행권 외에 전자여권, 수표, 상품권도 만들고 있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는 은행권 용지를, 이스라엘에는 주화를 수출한다. 하지만 원재료비의 상승으로 제품을 수출할수록 영업이익이 줄어드는 것으로 이번 국감에서 밝혀졌다.

―하루에 돈을 얼마나 찍나?

"한국은행에서 일년치 물량을 주문하면 연중 분배해서 찍는다. 하루 기계를 풀가동하면 전지(지폐 45장 크기)로 10여만장 찍는다. 새 지폐로 바뀌는 기간에는 밤새워 풀가동한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전지 5만여장쯤 찍는다."

―이를 '돈'으로 안 보고 '제품'으로 보면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나?

"불량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게 앞선다. 규격이 작아진 5천원권을 새로 발행할 때 '홀로그램'에서 문제가 있어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그런 사고가 안 나도록 집중하는 것이다. 간혹 인터넷 홈페이지에 잘못 인쇄된 지폐가 올라오면 '혹시 내가 만든 것이 아닌가' 긴장한다."

―제조 과정에서 불량품이 얼마나 생기나?

"불량률은 5%쯤 된다. 그 불량품 중 70~80%가 요판인쇄 과정에서 발생한다. 잉크가 묻어나거나 위치가 정확하지 않다든지. 해외에 나가면 외국돈을 바꿔 꼼꼼하게 살피는 버릇이 있다. 내 눈에는 에러(실수)로 보이는 게 곧잘 발견된다. 한국은행에서는 이런 실수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달러와 유로화 기준보다 우리 돈이 더 엄격한 것 같다."

―생산 단가를 낮추려면 이런 불량률을 줄여야 하겠지만, 안 생길 수는 없을 테고.

"무엇보다 바깥으로 나가면 대형사건이 된다. 우리 공장 앞에 '100-1=0'이라고 새겨놓은 탑을 봤을 것이다. 백에서 한 번만 잘못해도 모든 게 날아간다는 뜻이다. 그런데 잘못 만들어진 돈만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수집가는 은행에 가서 100만원권 수표로 새 지폐를 바꿔 검사하고, 또 바꿔서 검사한다고 들었다."

―지폐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조 방지다. 외국돈(달러·유로화 등)과 비교하면 어떤가?

"은행권의 위조 방지는 제지공정부터 인쇄공정까지 모든 단계에서 이뤄진다. 5만원권의 경우 24가지의 보안요소가 적용된다. 유로화나 달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숨은 그림, 돌출 은화,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잉크,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형상이 나타나는 홀로그램, 필터형 잠상, 요판잠상, 볼록인쇄, 앞뒷면 맞춤, 미세문자 등 공개된 보안요소 외에도 복사 방해, 스캔 방해 요소, ATM기 인식요소 등도 적용하고 있다."

―돈을 33년 동안 만들어왔으면 진짜 같은 위폐를 만들 수 있나?

"내가 일하는 분야는 제조공정 중 한 부분일 뿐이다. 설령 모든 공정을 섭렵해도 장비와 자재가 없이는 완벽한 위폐 생산은 불가능하다."

―돈다발이 쏟아지는 꿈을 꿔본 적 있나?

"돈꿈은 '개꿈'이라고 하지 않나. 지폐에 관한 꿈은 꾼 기억이 없고, 동전을 주워도 주워도 계속 줍는 꿈은 꾸어봤는데 역시나 개꿈이었다."

―나름의 돈 철학이 있나?

"돈을 만드는 직장에 다닌다고 특별히 다른 것이 없다. 그래도 내가 만들고 있는 돈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많이 흘러가서 그들에게도 꿈과 희망을 주는 도구가 됐으면 한다. 요즘 뉴스에서 많이 나오는 것처럼 부당하게 사용돼 사회 문제를 일으키거나 소시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않기를…. 사람들은 돈을 좇아 다니지만 그 돈 때문에 인생이 흥할 수도 망할 수도 있는 것을 많이 봤다."

나는 돈자루를 메고 나오진 못하고, 대신 구내매점의 커피 한잔을 얻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