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만든 조각

중세 직인(織人)들은 태피스트리(tapestry)에 빛깔이 다양한 실로 일상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한 무늬를 짜 넣었다. 섬유예술가 정정희(81)는 태피스트리에 심상(心象)을 짜 넣는다. 아니, 짜 넣는다기보다는 조각한다. '실로 만든 조각'. 정정희가 내린 태피스트리에 대한 정의다. 그는 20일까지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개인전 '태피스트리의 거장, 정정희'를 갖는다. 정정희는 씨실과 날실이 쫀쫀하게 교차돼 이룬 덩어리의 군데군데 구멍을 뻥뻥 뚫는다. 구멍 사이로 비친 빛이 벽과 바닥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조각의 허상 공간(negative space·작품에 실재하지는 않으나 작품이 이루어내는 조형적 가상 공간)과 같은 개념이다.

서울대 조소과 출신의 정정희는 1960년 6개월짜리 아들을 떼놓고 국비 장학생으로 미국 연수를 갔다. 필라델피아 뮤지엄 미술대학에서 1년간 섬유예술을 배우고 돌아와 다시 주부로 복귀했다. 세 아이를 키우는 틈틈이 안방에 직조기를 들여다놓고 태피스트리 작업을 했다. "살림하는 주부가 저 자신을 위해 돈 쓰기가 쉽지 않았어요. 태피스트리는 조각 작품에 비해 돈이 적게 들고 보관 장소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까요." 1957년 제6회 국전 조각부에서 처음 출품한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해 '촉망받는 여류 조각가'로 평가받았던 그가 섬유예술가로 돌아선 이유다.

'날고 싶은 마음'(1987), '즐거운 추억'(1989) 등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 20여점에 그가 50년 동안 오색 실을 짜고, 꼬고, 비틀어 표현한 일상의 소회와 기억이 담겨 있다. (02)3217-6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