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피아니스트, 빛나는 재기

지난 6일 저녁 일본 도쿄 산토리홀. 검정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 이경미(49·경남대 교수)씨가 무대로 걸어나왔다. 연주곡목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 모차르트가 남긴 27곡의 피아노 협주곡 중 단 두 곡밖에 없는 단조 작품이자 걸작이다. 작곡 당시 형편이 너무 궁핍해서 곡조에 그의 슬픔과 고뇌가 미묘하게 배어 있다.

이씨는 재빠르게 교차하는 어둡고 밝은 악상을 뉴 재팬 필하모닉(지휘 오야마 헤이치로)과 함께 주고받으며 모차르트 특유의 풍미를 자아냈다. 2부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으로 채웠다. 암 판정을 받은 지 2년 반 만의 대형 무대였다.

이씨는 2009년 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매년 받던 건강검진을 바쁘다는 핑계로 2년간 건너뛰었을 때다. "배신, 그 말만 떠올랐어요. 피아노를 향한 배신감이었지요.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고 40년 넘게 너(피아노)만 바라봤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니…."

그날로 피아노 뚜껑을 닫았다. 왼쪽 가슴 일부를 잘라내고 하릴없이 빈둥대던 어느 날 라디오에서 조용필의 '창 밖의 여자'가 흘러나왔다. 그때까지 가요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차라리 차라리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이 노랫말이 가슴을 쳤다. 피아노 앞에 다시 앉았다. 수술 부위에 통증이 몰려왔지만 연주에 큰 문제는 없었다.

산토리홀 공연을 제의받은 건 불과 두 달 전. 일본 매니저인 히라사 모토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모차르트는 천사의 음악이니까 천사의 노래를 해라. 그러면 피아노에 대한 원망도 사라져 다시 연주자로 날아오를 수 있을 거다'라고 했다. 이씨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할게요!"를 외쳤다.

초·중학교 때 일본에서 음악 수업을 받은 이씨는 오사카필하모닉·도쿄심포니 등과 모차르트를 협연하면서 모차르트 전문가로 이름났다. 2000년 지휘자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가 이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와 일본 10개 도시에서 모차르트 협주곡 20·23번을 협연했고, 모차르트 협주곡 전곡 녹음에도 도전했다. 한편 산토리홀은 이씨가 15년 전 일본 데뷔 무대를 가진 공연장이다.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으로부터 '클래식의 보석상자'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아름다운 음향을 자랑하며 카네기홀·링컨센터 등과 더불어 국제적 무대로 평가받는다.

공연 전 진통제를 맞으며 입술을 살짝 떨었던 그녀는 공연 후 "헝클어졌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았다"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