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녹음테이프에 담긴 어머니의 목소리
입력 : 2011.10.11 23:31
"가족 돌보느라 忍苦의 세월 보낸 어머니와 다르게 살고 싶었는데
내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아
20년 전 딸아이가 녹음한 八旬 어머니의 인생회고 들으며
이젠 만날 수 없는 어머니께 참회의 편지를 쓴다"
아이들이 한바탕 떠들고 간 집안이 썰물이 빠져나간 갯가마냥 적막하다. 예전에 내가 고향(충남 온양)에서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는 날도 그랬을 것이다. 빨리 올라가라고 재촉하시면서도 어머니 얼굴에는 늘 외로운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오늘 밤 나 역시 그렇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심사를 다스리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문갑 속에서 녹음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녹음이 잘 되지 않아 끊겼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하지만 이 세상에서 다시 들을 수 없는 생전의 어머니 음성이기에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다.
20년 전 대학을 졸업한 내 둘째 딸이 첫 월급을 탄 해이니 어머니가 팔십이 넘었을 때이다. 어머니는 외손녀가 사 드린 폭신한 내의보다 훌쩍 커버린 그 아이의 덩치를 더 대견해하셨다. 조부모를 보지 못한 딸은 외할머니를 끔찍이도 따랐다. 오랜만에 만난 외할머니와 외손녀는 밤이 이슥토록 정담을 나눴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새벽녘이 되자 어머니는 목욕재계하고 법복(法服)을 갈아입더니 독경(讀經)을 시작하셨다.
천수경을 읽고 아미타경이 끝나자 어머니는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면서 발원을 하셨다. "내 속에서 태어난 팔 남매에 딸린 식구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오늘도 무탈하게 해 주십사고 부처님 전에 비옵니다." 큰아들 식구부터 차례로 호명을 하는데, 한 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기도가 끝나고 어머니는 실타래를 풀 듯 살아오신 얘기를 꺼내놓았다. 그때 딸아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녹음을 해놓은 것이 지금 이렇게 소중한 보물이 됐다.
외할머니가 사 남매를 낳고 일찍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훈장이셨던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갔다. 외삼촌 둘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집을 나간 후 생사를 모르게 되고 외할아버지마저 어머니 열네살 때에 돌아가시자 남매는 이모 집에서 얹혀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마을교회에서 언문을 배웠고 외할아버지가 아이들 가르치는 방 뒤에 숨어 한문을 익혔다. 그때 글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불경(佛經)을 어찌 읽으며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겠느냐고 두고두고 고마워하셨다. 그리고 열아홉에 층층시하에 시집와서 시집살이했던 이십여 년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사연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 놓으셨다.
팔 남매를 가르치고 오붓하게 살아보자는 남편 뜻을 받들어 힘들게 살림을 일궈놨지만 오십에 남편을 앞세우고, 어린 자식들을 떠안게 되니 앞이 캄캄하더란다. 기쁜 일보다 통곡할 일이 더 많았던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 몫으로 땅 한 뙈기 남겨놓지 않았다는 원망을 풀어놓았다. 그동안 '남편은 하늘'이라고 하시던 어머니가 순종과 희생을 한(恨)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오늘 밤 나 역시 그렇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심사를 다스리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문갑 속에서 녹음테이프를 꺼내 들었다. 녹음이 잘 되지 않아 끊겼다 이어지기를 되풀이하지만 이 세상에서 다시 들을 수 없는 생전의 어머니 음성이기에 더없이 소중한 보물이다.
20년 전 대학을 졸업한 내 둘째 딸이 첫 월급을 탄 해이니 어머니가 팔십이 넘었을 때이다. 어머니는 외손녀가 사 드린 폭신한 내의보다 훌쩍 커버린 그 아이의 덩치를 더 대견해하셨다. 조부모를 보지 못한 딸은 외할머니를 끔찍이도 따랐다. 오랜만에 만난 외할머니와 외손녀는 밤이 이슥토록 정담을 나눴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새벽녘이 되자 어머니는 목욕재계하고 법복(法服)을 갈아입더니 독경(讀經)을 시작하셨다.
천수경을 읽고 아미타경이 끝나자 어머니는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절을 하면서 발원을 하셨다. "내 속에서 태어난 팔 남매에 딸린 식구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오늘도 무탈하게 해 주십사고 부처님 전에 비옵니다." 큰아들 식구부터 차례로 호명을 하는데, 한 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기도가 끝나고 어머니는 실타래를 풀 듯 살아오신 얘기를 꺼내놓았다. 그때 딸아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녹음을 해놓은 것이 지금 이렇게 소중한 보물이 됐다.
외할머니가 사 남매를 낳고 일찍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훈장이셨던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어려운 살림을 꾸려갔다. 외삼촌 둘이 독립운동을 한다고 집을 나간 후 생사를 모르게 되고 외할아버지마저 어머니 열네살 때에 돌아가시자 남매는 이모 집에서 얹혀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마을교회에서 언문을 배웠고 외할아버지가 아이들 가르치는 방 뒤에 숨어 한문을 익혔다. 그때 글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불경(佛經)을 어찌 읽으며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었겠느냐고 두고두고 고마워하셨다. 그리고 열아홉에 층층시하에 시집와서 시집살이했던 이십여 년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사연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 놓으셨다.
팔 남매를 가르치고 오붓하게 살아보자는 남편 뜻을 받들어 힘들게 살림을 일궈놨지만 오십에 남편을 앞세우고, 어린 자식들을 떠안게 되니 앞이 캄캄하더란다. 기쁜 일보다 통곡할 일이 더 많았던 인고(忍苦)의 세월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 몫으로 땅 한 뙈기 남겨놓지 않았다는 원망을 풀어놓았다. 그동안 '남편은 하늘'이라고 하시던 어머니가 순종과 희생을 한(恨)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내가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언니들도 하지 않은 공부를 하러 타향에 보낼 수 없다고 말리셨다. 나는 어머니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 원서를 낸 뒤 밤기차를 타고 친구 집으로 상경했다. 합격통지서를 받던 날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에게 시름을 안겨주었지만 그래도 한편 대견하셨는지 오빠들에게 허락을 받아주었다.
나는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운명이었는지 내 인생도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짓눌려 살던 어머니를 늘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남편도 내 아버지와 성격이 같았다. 원칙적이고 보수적인 남편은 아이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 늘 갈등했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삶을 생각하며 참아냈다.
일흔이 넘은 요즘, 나도 자식이나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에게 위로한답시고 그냥 잊으라고만 했지 그 긴 세월 어머니의 고통과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그 나이가 된 여자인 줄로만 알았다. 철들어서도 어머니 눈을 속이고 친구 따라 밖으로만 돌아다녔고 사랑 따라 훌쩍 떠나기도 했다. "너도 자식이 커야 어미 마음 알 거야"란 말씀이 가시가 되어 가슴을 후벼대리란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실감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위로받지 못하고 부처님에게 매달렸다. 돌아가실 즈음에는 모든 걸 인연법(因緣法)으로 받아들이고 아주 평안히 숨을 놓으셨다.
지금도 울적할 때면 녹음테이프를 꺼낸다.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으면 어머니가 살아계신 듯 착각이 든다. 사람들은 왜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없을까. 우리는 작은 노여움에 소중한 마음을 잃고 산다. 애써 가르쳐 놓았더니 보고 싶을 때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는다고 나무라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띄울 수 없는 참회의 편지를 썼다. 못다 한 효도는 다음 생(生)에 반드시 하겠노라는 맹세를 담아. "엄마, 보고 싶어요."
나는 어머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운명이었는지 내 인생도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짓눌려 살던 어머니를 늘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남편도 내 아버지와 성격이 같았다. 원칙적이고 보수적인 남편은 아이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 늘 갈등했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삶을 생각하며 참아냈다.
일흔이 넘은 요즘, 나도 자식이나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에게 위로한답시고 그냥 잊으라고만 했지 그 긴 세월 어머니의 고통과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그 나이가 된 여자인 줄로만 알았다. 철들어서도 어머니 눈을 속이고 친구 따라 밖으로만 돌아다녔고 사랑 따라 훌쩍 떠나기도 했다. "너도 자식이 커야 어미 마음 알 거야"란 말씀이 가시가 되어 가슴을 후벼대리란 걸 이 나이가 되어서야 실감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위로받지 못하고 부처님에게 매달렸다. 돌아가실 즈음에는 모든 걸 인연법(因緣法)으로 받아들이고 아주 평안히 숨을 놓으셨다.
지금도 울적할 때면 녹음테이프를 꺼낸다.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걸 듣고 있으면 어머니가 살아계신 듯 착각이 든다. 사람들은 왜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 수 없을까. 우리는 작은 노여움에 소중한 마음을 잃고 산다. 애써 가르쳐 놓았더니 보고 싶을 때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는다고 나무라시던 말씀이 생각나서 띄울 수 없는 참회의 편지를 썼다. 못다 한 효도는 다음 생(生)에 반드시 하겠노라는 맹세를 담아. "엄마,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