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LG배 세계기왕전] 用兵과 測量

〈제8보〉(89~93)=무릇 모든 전쟁은 양측 병력 간의 소모전이다. 내 병사가 잡히기 전 적병(敵兵)들을 먼저 섬멸해야 한다는 건 병법 이전의 상식이다. 바둑 고수(高手)들은 아예 자신의 병사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희생시킬까를 놓고 골몰한다. 그들의 한결같은 목표는 병력의 우위가 아니라 상대보다 더 큰 진지(陣地)를 구축하는 것이다. 복잡한 수읽기 과정에서 그들이 펼치는 용병술과 영토 측량술은 고등수학 뺨칠 만큼 현란하다.

바둑은 이제 단순화됐다. 흑백 돌덩이들이 서로 엉겨 대치 중인 중앙에 누가 먼저 깃발을 꽂느냐의 승부다. 단, 백은 좌변과 중앙을 최대한 키울 수만 있다면 중앙을 버릴 용의가 있다. 참고1도를 보자. 흑은 1로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6까지 중앙 여섯 점을 희생시켜야 한다. 이것으론 이길 수 없다. 89로 최대한 버틴 배경이다.

순간 백은 90, 92의 차단을 감행한다. 흑이 참고2도 5까지 좌변에 집착하면 중앙 흑돌들을 삼키겠다는 뜻. 이 그림도 백승이므로 흑은 93으로 일단 중앙부터 보강했다. 자, 중원은 누가 잡고 누가 잡힐까. 좌변은 어디서 흑백 간 경계선이 그어질까. 바둑은 바야흐로 마지막 절정의 단계로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