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두 얼굴을 들여다보다

"9년간 어디서, 뭘 하셨나요?"

14일 서울 광화문에서 이정향(47) 감독을 만나자마자 인사도 나누기 전에 물었다. 이 감독은 데뷔작 '미술관 옆 동물원'(1998)으로 젊은 관객의 감성을 움직이고, 두 번째 영화 '집으로'(2002)로 400만명 넘는 관객을 웃기고 울렸다. 단 두 편의 영화로 평단과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냈던 그는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여성 감독이라 더 주목받았다. 9년 만에야 그는 신작 '오늘'을 들고 돌아왔다.

"그동안 뭐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영화 보면 짐작이 가지 않아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오늘'의 시나리오 작업에만 5년이 걸렸다"며 "이 기간 읽은 책이 평생 읽은 것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았고 손바닥 반만한 포스트 잇에 깨알 같은 글씨로 아이디어 메모를 해놓은 게 5년 동안 4000장이 쌓였다"고 했다. "'오늘'은 데뷔 전부터 구상했던 작품이긴 하지만 막상 시작하려고 하니 준비할 게 많았다. 균형잡힌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자료 조사를 꼼꼼히 하고 시나리오도 여러 번 고쳐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영화의 주제뿐 아니라 주연배우 송혜교도 의외라는 반응이 많다. 송혜교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정향 감독은 "송혜교측에서 먼저 영화 출연 의사를 밝혀 왔을 땐 '안 될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었다"며 "직접 만나보니 TV 드라마나 CF에서의 발랄하던 모습과 달리 아주 차분하고 진지해서 애어른 같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간 여배우 혼자서 주연으로 나서는 영화가 거의 없었나 봐요. 제 시나리오 작업 소식이 나왔을 때 혜교 말고도 (출연을) 기대했던 여배우들이 몇몇 있었다고 들었어요."

이정향 감독의 다음 작품을 보기 위해선 또 9년을 기다려야 할까. 그는 "내가 테런스 멜릭('트리오브라이프'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고 30년간 5편의 영화를 찍은 감독)도 아닌데 뭘 그렇게 오래 걸리겠느냐"며 "그동안은 감독으로서 사춘기를 겪어서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고 했다. "영화 때문에 행복했기에 영화감독이 됐어요. 그런데 막상 촬영장 가기 전날에는 '내일 지구가 안 망하나'라고 할 정도로 영화 찍는 게 힘들어요. 이렇게 힘든데도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기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요. 또 영화 찍으려 들걸요."

'오늘'은 남녀의 사랑이나 세대를 초월한 가족의 사랑과 같은 따뜻한 소재를 다룬 감독의 전작과 확연히 다르다. '용서'를 주제로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다룬 이 영화는 묵직하고 어둡다. 다큐멘터리 PD 다혜(송혜교)는 자신의 생일날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잃는다. 용서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가해자 소년을 용서하고 1년 후 용서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기획, 다양한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촬영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용서해준 17세 소년을 떠올리며 '착하게 살고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담담히 촬영을 진행하던 중 우연히 전해 들은 그 소년의 소식에 커다란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 감독은 "데뷔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란 잡지에서 '용서의 위선'에 관한 칼럼을 읽고서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며 "우리 사회 일부에서 범죄에 희생된 피해자 인권은 별로 돌보지도 않으면서 가해자 인권부터 챙기는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오늘'의 인물들에겐 유독 대사가 많다. 주인공 다혜는 물론이고 그가 취재하는 인물들과 주변에서 그에게 용서를 권하는 인물들 모두 '용서'에 대해 계속 얘기한다.

"대사가 많다 보니 '영화에 설명이 너무 많다', '가르치려 드는 영화다'는 비판도 있어요. 그러나 대사의 행간을 잘 읽어보면 용서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짓눌리고 상처받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라는 걸 알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