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혁림은 내 운명

가을 오후의 비스듬한 햇살이 미술관 창을 통해 들어오자 그림 속 푸른 바다가 은은하게 반짝였다. 코발트 블루의 바다, 새빨간 태양, 황금빛 산들이 어우러진 그림은 가로 6m, 세로 3m의 대작. 지난해 5월 94세로 세상을 뜬 전혁림의 2005년작 '통영항'이다. 통영에서 나서 이곳에서 눈을 감은 화가는 평생 고향의 맑은 바다를 화폭에 담았다. 정규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중앙 화단에서 활동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실력은 생전 널리 알려졌다.

전혁림 1주기 기념전 '나는 전혁림이다'가 경기도 용인 이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가로 7m, 세로 2m의 '기둥 사이로 보이는 한려수도' 등 대표작 38점이 나온 이 전시는 전혁림 생전에 그를 후원해 온 김이환(76) 이영미술관장이 전혁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련한 것. 전시에 나온 작품 모두가 김 관장의 소장품이다. "작년 선생님 돌아가셨을 때 영전에 고했어요. '선생님 살아계실 때 탄생 100주년전을 크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몇 년을 못 채우고 가셨으니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대신 1주기 때는 선생님 전시를 크게 열어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87년 무렵. 부인 신영숙(71)씨가 사온 전혁림의 그림, 그 강렬한 색채에 매료된 김 관장은 이후 꾸준히 전혁림 작품을 수집했고, 2003년부터 5년간 매주 토요일 왕복 760㎞의 거리를 마다않고 서울에서 통영을 오갔다. 통영에 갈 때마다 부부는 화가에게 용돈과 함께 가로·세로 20㎝짜리 소나무 소반을 내밀며 "다음주에 다시 뵈러 올 테니 여기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했다. 부부는 매주 숙제하듯 통영으로 내려갔고, 화가 역시 매주 부부가 내준 숙제를 충실히 해냈다. 그 결과 완성된 것이 가로·세로 20㎝짜리 소반 1050개에 추상 문양을 그려넣어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새 만다라'(2003~2008)다. "'어떻게 하면 좋은 화가가 좀 더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기도록 할 수 있을까'가 우리 부부의 고민이었습니다. 화가도 인간이라 신명이 나도록 격려하는 게 중요하지요. '내가 그림을 그리면 와서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연세 드신 선생님께 작업 동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공무원·대기업 임원·사업가로 살아온 김이환 관장은 1970년대 후반 평소 그림을 좋아했던 내고(乃古) 박생광(1904~1985)을 후원하게 되면서 미술 컬렉터이자 후원자의 길을 걷게 된다. 2001년 경기도 용인에 돈사(豚舍)를 개조한 '이영미술관'을 열며 미술관장으로 거듭난다. 현재 이영미술관에선 박생광 작품 100여점, 전혁림 작품 200여점 등을 소장하고 있다.

재벌도 아닌 개인이 작가를 후원하니 말도 나왔다. 미치광이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고, '장삿속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김 관장은 "남들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운명'이라고 여긴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힘에 부칠 때면 중도에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요. 그러나 '하늘이 내린 천재가 나와 인연을 맺게 됐으니 그분이 한 점이라도 더 남기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 숙명처럼 느껴졌어요."

전혁림 탄생 100주년인 2015년엔 통영처럼 푸른 바다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모마(MoMA)에서 100주년 기념전을 여는 것이 김 관장의 꿈이다. 이번 전시는 내달 30일까지. (031)213-8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