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할아버지의 혼도 기뻐하셨을 것"

"우리 할아버지 역을 맡은 배우 정성화씨에게 이걸 꼭 전해주세요."

지난달 2일 미국 뉴욕 링컨센터 내 데이비드 코크 극장.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주인공인 창작 뮤지컬 '영웅(한아름 작·윤호진 연출)'의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세련된 80대 여성이 안내 데스크를 찾았다. 여성이 주머니에서 꺼낸 편지 봉투에는 '미스터 정성화'라고 적혀 있었다. 영문 모르는 안내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녀가 말했다. "제가 안중근 의사의 외손녀입니다."

소란의 주인공은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실(80)씨. 미국 텍사스에 사는 황씨가 '영웅'의 공연 소식을 듣고 뉴욕까지 날아온 것이다. 급히 연락받은 제작팀이 달려와 "정씨를 직접 만나서 주시면 어떻겠느냐"고 안내하려 하자 황씨는 "나 같은 사람이 찾아가면 방해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편지를 건네받은 배우 정성화씨가 봉투를 열자 또박또박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손으로 쓴 편지 두 장이 나왔다.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열심히 살고 계시는 동포들에게 의미 있고 훌륭한 공연을 보여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중략) 아직 할아버지의 혼은 저 추운 하얼빈 어느 곳에서 조국을 그리워하시면서 돌아오실 것을 기다리시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아픕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저 하늘나라에서 '영웅'을 보시면서 씩씩한 젊은이들의 모습과 재능에 많이 자랑스럽고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정성화씨는 공연 직전 배우들을 불러 모아 편지를 읽어줬고, 배우들은 일순간 숙연해졌다. 꼿꼿하고 강건한 필체는 할아버지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정씨는 "안 의사의 외손녀가 직접 나의 연기를 보러 오셨다는 생각에 묵직한 뭔가가 끓어올랐다"며 "마지막 공연을 더 진지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26일 안 의사 의거 102주년을 맞아 황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황씨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서울에서 '영웅'을 보지 못한 것이 유감으로 남아 있다가 뉴욕 공연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며 "특히 안중근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수의(壽衣)를 보내며 '이제 편히 쉬어라'는 노래로 안중근을 어루만지는 대목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고 했다.

2막에서 안중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장부가(丈夫歌)'를 힘차게 부르는 부분도 슬펐다고 했다.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우리 꿈 이루도록/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우리 뜻 이루도록…." 황씨는 "할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이 왈칵 다가오는 것 같아서…"라고 했다.

안 의사는 2남 1녀를 뒀다. 맏딸 안현생의 두 딸 중 막내가 황은실씨다. 황씨는 "어렸을 때는 엄마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며 "우리 가족은 계속 중국 상해에 있다가 1946년 조국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시련도 많았다. "한국에 온 뒤 지낼 곳조차 없어 어머니가 명동성당에서 5년을 수녀님들과 살았다. 피난생활이었다"고 했다. 195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지 벌써 60년이 넘었다.

공연을 보고 외손녀로서 자랑스럽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황씨는 "도리어 부끄럽지"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큰일을 하셨는데 나는 나라에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좋은 공연 만들어줘서 연출자에게 정말 감사하고, 정성화씨한테 내가 팬이 됐다고 꼭 전해줘요."

뮤지컬 '영웅'은 12월 6일부터 내년 1월 7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재공연한다. 1544-1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