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는 그에게 밥을, 그는 피리에게 자유를 주었다

친척 집과 고아원을 전전하던 14세 소년 앞에 "공짜로 배울 수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1950년대 후반 고학생(苦學生)에게 국비 장학금을 주는 곳이었다. 6년간 교복과 학용품은 물론 매달 장학금 3000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소년은 망설임 없이 국악사양성소로 들어갔다. 그 후 55년간 '국악'은 그를 "먹여 살린 은인"이었다. "음악이 뭔지도 몰랐던 내가 선뜻 국악의 길을 걸었으니 또한 팔자소관"이기도 했다. 제18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인 가산(茄山) 정재국(鄭在國·69) 선생 얘기다.

◇피리정악의 산증인

1994년 1회 수상자를 낸 방일영국악상이 명창이나 민속악 연주자가 아닌 정악, 그것도 피리 연주자에게 돌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재국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로 피리정악의 최고 명인으로 꼽힌다. 1966년부터 국립국악원의 전임 악사·연주단 악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원장 등을 역임하며 정통 아악의 전통을 계승했다.

특히 1972년 4월 2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최한 '제1회 정재국 피리독주회'는 한국 음악 사상 최초로 피리가 주인공이 된 독주회였다. 1990년에는 정악의 테두리를 넘어 민속 피리의 명인 이충선 선생에게서 민속 피리를 배워 '정재국류 산조'를 작곡했다. 1999년에는 저음 피리와 고음 피리를 개발해 피리의 음역을 넓히고, '정재국의 새로운 음악세계―개량피리연주발표회 및 연구성과보고회'를 열어 피리 이론에서도 독보적 분야를 개척했다.

1942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정재국 선생은 4세 때 아버지를, 8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2남 1녀의 장남으로 끼니를 잇기 어려워 초등학교도 근근이 졸업했다. 1956년 국악사양성소 2기로 입소했다. 이듬해부터 김준현(1918~1961)·김태섭(1922~1993) 선생에게서 피리정악을, 이충선(1901~1989) 선생에게서 민속악 피리를, 최인서(1892~1978) 선생에게서 대취타를 사사했다. 그에게 국악사양성소는 고향이자 부모였다.

◇군대에서 배운 민속악

하지만 당시 피리는 다섯 악기(피리·대금·해금·거문고·가야금) 가운데 비인기 종목이었다. 부는 데 힘이 너무 들어 대부분 예순 전 은퇴하고, 독주곡도 드물기 때문. 그러나 그는 "정악에서는 주선율을 담당하고 곡의 분위기를 끌어가는 피리가 '악기의 왕'"이라고 설명했다.

정악만 고집하던 그가 민속악의 매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스물한 살에 강원도 화천의 군예대(軍藝隊)에서 대금 명인 이생강(74·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씨를 처음 만났다. 둘은 듀엣으로 활동하며 '나그네 사랑' '번지 없는 주막'을 열심히 불었다. 당시 공연에서 사회를 맡았던 부대 고참이 바로 2002년 작고한 코미디언 이주일씨였다.

◇가슴 속 恨, 피리로 날리다

1966년 제대 후 국립국악원 전임 악사로 취직했을 당시 첫 월급은 3500원. 쌀 한 가마니가 4500원 하던 시절이었다. 이듬해 스승인 김태섭 선생에게서 수석 악사 자리를 이어받고 그 후 30년간 피리를 불었다. "정통 정악과 현대를 잇는 '다리'라는 자부심"이 그를 지탱해줬다.

1997년 정악 연주 단체인 정농악회(正農樂會) 2대 회장으로 취임해 정악 보급에 앞장서는 틈틈이'대취타'(1996) '피리정악보'(2007) 등의 저서, '피리시김새를 통해 본 수제천' '개량피리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피리 명인이 사용하는 피리는 대당 10만원. 200만원을 호가하는 대금, 1000만원이 넘는 가야금에 비하면 값도 싸다. 반면 소리는 가야금 4~5대가 못 당할 정도로 우렁차고 강약 조절도 자유로워 듣는 이를 압도한다.

방일영국악상 수상 소식을 전화로 알릴 때 정재국 선생은 헬스장에 가던 길이었다. 나이 들어서도 불기 위해 평소 꾸준히 자기관리를 하고 있는 것.

"피리를 불면 가슴 속 맺혀있던 한이 훌훌 날아가 버려요. 대나무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가 꿋꿋하고 힘이 차 약해지려는 마음을 강하고 바르게 만들어주지요. 나한텐 피리만한 보약이 따로 없어요."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명인은 "건강만 허락된다면 죽을 때까지 피리를 불고 싶다"며 '영원한 현역'을 꿈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