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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넘치고 재미있는 스토리에 귀여운 캐릭터까지, 애니메이션은 관객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안겨주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연상호(33)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다음 달 3일 개봉)은 애니매이션계(界)의 '돌연변이'다. 돼지의 왕은 유머 대신에 폭력과 욕지거리를 담았고 한국 사회를 해부하듯 까발린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이 영화에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넷팩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 CGV무비꼴라쥬상을 줬다. 28일 서울 홍익대 근처 한 카페에서 연 감독을 만났다.

돼지의 왕은 중학교를 무대로 폭력과 계층이 구조화한 우리 사회를 보여준다. 가난하고 무력한 경민(박희본)과 종석(김꽃비)은 공부도 잘하고 힘 있는 일당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싸움을 잘하는 철이(김혜나)가 이들을 도와 '혁명'을 도모하지만 현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연 감독은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있는 신구중학교를 나왔는데 영화랑 비슷한 분위기였다. 종석이가 누나의 '게스' 청바지를 입고 갔다가 애들한테 '여자 옷 입고 왔다'며 옷을 찢긴 것이나 공부를 잘하고 반에서 인기도 많은 전학생이 기존 세력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건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나는 매우 평범한 학생이었고, 우리 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종석이처럼 가난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돼지의 왕에서 '돼지'와 '개'는 사회적 관계에서 각각 하위계층과 상위계층에 있는 사람을 빗댄 것이다. 연 감독은 "돼지에 대한 연민이 있다"고 했다. "돼지가 개보다 지능이 높대요. 그런데 개를 먹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돼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먹잖아요. 식량과 친구를 나누는 근거가 대체 뭔가요."

성인이 된 종석과 경민은 각각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과 '커플즈'의 배우 오정세가, 경민·종석·철이의 어린 시절은 각각 박희본·김꽃비·박혜나 등 여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연 감독은 "덩치나 생김새에 있어서도 괴롭힘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 간에 격차를 두고 싶었다"며 "괴롭힘 당하는 아이들은 성인 남성이 아직 되지 않았다는 설정을 했기 때문에 여자들 목소리가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돼지의 왕은 1억5000만원의 제작비로 1년 동안 만들었다. KT&G 상상마당에서 1억3000만원을,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2000만원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제작비가 30억원이고, '소중한 날의 꿈'의 제작기간이 10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시간과 돈을 모두 아낀 셈이다. 연상호 감독은 "1억여원 갖고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며 "예전에 하도급회사에서 일하면서 발견한 작은 불만과 문제들을 고치며 나만의 시스템을 새로 만들었더니 제작비가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했다. 청강산업대와 산학협력으로 일을 같이 한 것도 도움이 됐다. "장비와 공간을 지원받을 수 있었고, 애니메이션학과 학생 10명이 작업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1억5000만원은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엔 아주 적은 돈이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억원짜리 만들었다가 30억원짜리 만들 수는 있어도, 그 반대는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경민과 종석, 철이와 같은 '돼지'들이 꿈꿨던 변화는 결국 이뤄지지 않는다. 성인이 돼서도 이들은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어린 시절의 상처로 괴로워한다. "세상이 변할 수 없다는 얘기냐"고 묻자 연상호 감독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이런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관객들이 출구가 없는 이 답답한 상황을 체감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느끼면 느끼는 대로 움직이거든요. 사람은 희망을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는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