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늘 지옥이었는데 붓이 날 천국으로 이끌었죠"

한국에서 건너간 26세 간호보조원은 틈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가족도, 친구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 독일 함부르크, 종일 치매 환자들과 씨름하다 숙소로 돌아오면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적막과 고독 속에서 우편엽서에 실린 풍경, 정물, 인물화를 따라 그렸다. 독감으로 출근하지 못한 어느 날, 병문안을 온 간호장이 벽에 붙어있는 그림을 보고 감탄했다. 얼마 후 간호장의 주선으로 병원 회의실에서 그의 첫 전시회 '여가를 위한 그림'이 열렸다. 함부르크 신문에 그의 인터뷰 기사가 실리고, 처음으로 그림이 팔렸다. 그에게 화가로서의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고, 그 사이 40년이 흘렀다.

재독(在獨) 화가 노은님(65) 개인전 '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이 23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두가헌 갤러리에서 열린다. 전시회 제목을 지은 건 작가다. "나는 항상 '오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오늘'이라는 시점은 금방 지나가버리니까. '오늘'만 있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부담이 안 되고, '내일'을 생각하면 부담이 된다." 아직도 벽지(僻地) 어디쯤에 살고 있는 듯한 사람의 표정으로 작가는 말을 이었다. "큰 병에 걸린 친구들이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요. 저는 '네가 오래 살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거다. 다 잊어버리고 오늘 하루만 무사히 넘긴다고 생각하라'고 말해줘요. 그러면 다들 위안을 받고 돌아가요."

느릿하고 평온한 말투에서 '달관'의 느낌이 난다. 젊을 적 신산한 삶이 준 교훈일지도 모른다. 전주 출신인 그가 21세 때 운수업을 하던 아버지가 망했고,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떴다.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 포천의 한 면사무소 결핵관리요원으로 취직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1970년 어느 날 그의 눈에 독일로 갈 간호보조원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가 들어왔다. "나, 독일 갈까?" 식구들은 '설마 가겠나' 싶어 무심히 답했다. "가라, 가."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는 비행기를 탔다.

첫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노은님은 이듬해인 1973년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밤엔 일하고 낮에는 그리길 6년. 교수들은 재능을 인정했고, 시에서는 장학금을 줬다. 그러나 마음은 지옥이었다. "당시 제 별명이 '글쎄요'였어요. 모든 질문에 '글쎄요'라 답했으니까. 제대로 된 길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자신이 없었어요." 그는 젊음 탓으로 돌렸다. "젊어서 그랬을까. 항상 남과 나를 비교했어요. 그림을 그리면서도 계속 그랬죠. 저 사람은 남자도 있고, 돈도 많고, 애들도 있는데 나는 없는 게 더 많거든요. 그런 생각을 하면 나 자신이 더 초라해져요. '내 팔자는 왜 이런가' 하는 고민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항상 벌 받는 사람처럼 살았어요."

자신감을 찾는 데는 세월이 약이었다. 1980년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동·식물을 붓 가는 대로 그렸다. 단순하면서도 즉흥적인 그림에 독일인들이 열광했다. 좋은 화랑을 만났고, 그림이 잘 팔렸다. 백남준·요셉 보이스 등의 거장과 함께 '평화를 위한 비엔날레'에도 참가했다.

그를 한국에 소개한 건 백남준이었다. 한국 화랑 주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가 소리쳤다. "독일에 노은님이라고 그림 잘 그리는 여자가 있더라." 그를 계기로 노은님은 1982년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한국 화단에도 이름을 알렸다.

1990년엔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 교수가 됐고, 56세 때인 2002년엔 결혼도 했다. '헌 옷 입은 것처럼 편한' 같은 대학 교수가 상대였다. "지금은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죠. 옛날엔 사람들이 '넌 어쩌면 그렇게 팔자가 세냐. 시집가서 아이 낳고 편안하게 살지'라며 혀를 쯧쯧 찼지만 요즘엔 절 부러워하니까요. 생각해보면요, 제 젊은 시절의 방황엔 다 뜻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저기 이 구석 저 구석 쓸려 다니며 살아온 게 저를 많이 키워줬다고나 할까요."

이번 전시회에는 삶에 대한 기쁨과 희망을 물고기, 새, 나비, 어린이 등의 형태를 빌려 종이와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표현한 2009~2011년 사이의 작품 40여점이 나온다. 지난해 정년퇴임하고 독일 남서부 미헬슈타트의 작은 고성(古城)을 개조한 작업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노은님은 "고요한 숲 속에서 새끼를 데리고 나온 어미사슴, 여우, 숭어떼 등을 벗하며 살고 있다. 자연에 동화된 삶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고 했다. (02) 2287-3591, 3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