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비기너스… 뭐든지 시작은 늘 설레고 두려워

첫사랑은 잊기 힘들다. 난생처음 가슴이 두근거려서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처음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느끼는 감각 때문에 얼마나 들떴었는지를, 그리고 처음으로 겪는 상실감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어찌 쉽게 잊겠는가. 첫사랑만이 아니다. 첫 등교, 첫 직장, 첫 출산 등 시작하는 순간은 다 그렇다.

마이크 밀스 감독의 '비기너스'는 제목 그대로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일러스트 작가인 올리버(이완 맥그리거)의 아버지 할(크리스토퍼 플러머)은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다. 75세의 할은 젊은 남자친구를 사귀고 동성애자인 친구들을 만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올리버는 아버지를 도와주면서도 열정이 없던 결혼생활 때문에 외로웠던 어머니가 떠올라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다.

극 중 할의 인생은 밀스 감독 아버지의 실제 그것과 똑같다. 밀스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담하고도 현실적으로 풀어냈다. 75세의 노인이 20세 젊은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사랑과 삶을 찾아나서는 모습이나 남다른 부모의 삶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이를 묵묵히 긍정하는 아들의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마 관객들도 남들보다 늦게 새 삶을 시작하는 할을 위태위태한 심정으로 지켜보면서 응원하게 될 것이다.

할은 암 선고를 받은 뒤에도 적극적으로 새 인생을 즐기다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마저 잃은 올리버는 프랑스 여배우 애나(멜라니 로랑)를 만나지만 사랑을 시작하는 데는 망설여진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온 애나도 두려운 건 마찬가지다. 해피엔딩이지만 이들의 로맨스는 달콤하지 않고 좀 씁쓸한 편이다.

영화는 이렇다 할 사건도, 갈등도 없이 흘러간다. 웃음이나 눈물을 터뜨릴 정도로 감정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미소를 지으면 영화를 볼 수 있는 건 그래픽 디자이너 출신 마이크 밀스 감독의 재기 넘치는 시나리오와 연출 덕분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의 불안과 행복을 드러내는 이완 맥그리거와 멜라니 로랑은 물론, 노년의 새 삶을 만끽하는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연기도 흠잡을 데가 없다.

삶의 동반자를 잃고 암 선고까지 받은 75세의 할이 왜 굳이 쉽지 않은 새 삶을 시작하려고 했을까. 사랑이건 일이건 뭐든지 시작할 때 느끼는 떨림과 기쁨, 고통 등이 그로 하여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1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것이 포인트]

#장면
올리버와 애나가 처음 파티에서 만나 필담을 나누는 장면. 대화도 없이 남녀가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 보여준다.

#대사
'나는 78세의 매력적인 게이입니다' (할이 동성 애인을 찾기 위해 신문에 낸 광고 첫 구절. 아들 올리버는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이 글을 발견해 읽곤 사랑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해외평
'움츠리지 않은, 거센 마음을 가진 영화'(뉴욕 옵저버)

#이런 분들 보세요
상처 받을까 봐 사랑을 시작하기 두려운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