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면… 회화의 눈·코·입이 보이다

김종학(57) 세종대 교수의 연구실 벽에 철로 만든 꽃 무더기가 걸려 있었다. 검정 철선(鐵線)으로 꽃잎과 풀잎의 형태를 드로잉하듯 표현하고, 군데군데 노랑·빨강·흰색 꽃송이 모양의 철판을 박아넣었다. 가로 308㎝, 세로 225㎝의 이 작품은 김종학의 최신작 'Erection(발기하다)' 시리즈 중 한 점. 'Erection'이라는 제목은 캔버스에서 회화의 요소들이 뛰쳐나왔다는 뜻이다.

작품의 모태는 2008년 모로코 여행을 갔을 때의 호텔 밖 풍경.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는 여기서 풀과 나무를 건졌다. 꽃은 표현해봤지만, 이것들은 처음이다. "회화 구성요소로서 선(線)에 대해 관심을 막 가질 무렵이었죠. 선이란 요소를 끌어내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선의 집합체인 풀과 나무는 그런 점에서 그에게 좋은 소재였다.

김종학은 감성적 예술가라기보다는 논리에 더 집중하는 작가다. 인터뷰 내내 그는 수학적 구성요소를 강의하듯 조근조근 설명을 늘어놓았다.

10~20일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갖는 '제23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 기념 개인전'의 화두 역시 '회화의 구성요소에 대한 탐구'. 육탈(肉脫)한 듯 불거진 등 마디만 강조된 새우, 면을 배제하고 테두리의 형태만 남긴 꽃과 나무 등 작가가 지난해부터 몰두하고 있는 스틸 드로잉(steel drawing) 12점이 나온다. 작품을 지배하는 첫 느낌은 생동감과 실재감이다. "그림에서 바탕화면과 명암을 제거하면 점·선·면 등의 구성요소만 남게 되잖아요. 예전엔 '이미지'의 덩어리 속에 녹아들어 가 감춰져 있었던 그 요소의 실재를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회화를 해체한 이 작업은 더 이상 회화라기보다는 조각이나 설치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종학은 작품의 아이덴티티를 '회화'라 강조했다. "설치나 조각의 개념은 아니다. '회화 부조' 정도로 보면 된다. 디지털 이미지의 레이어(layer·층위) 개념에 착안해 회화의 층위를 하나하나 벗겨 내고구성요소들을 평면에 재구성한 것이다."

전시회에는 신작 12점 외에도 김종학의 화력(畵歷)을 짚어볼 수 있는 대표작 7점이 나온다. 가로 4m, 세로 3m의 대형 화면에 거대한 포도를 그린 1999년작이 그 중 하나다.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9년 프랑스 파리로 떠나 작품활동을 했던 김종학은 1994년 귀국전에서 포도알을 수박만 하게 그린 대형 포도 작품을 내놓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평론가들은 생명의 에너지가 응축된 듯한 그의 포도 작품을 "일상의 사물에서 발견한 생명의 경이를 담았다"고 평했고, 그로 인해 그에게는 '포도 김종학'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꽃을 갈색 패널 위에 커다랗게 그린 '불꽃' 연작을 선보였고, 2009년엔 아크릴판 위에 우레탄 도료를 사용하는 재료 실험도 했다. 지치지 않는 새로운 시도. 김종학은 "90년대 포도 작업을 할 때엔 '면과 터치'에 집중했고, '불꽃' 연작은 '색(色)'을 극대화시킨 것"이라고 했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관심사는 한결같이 '회화의 구성요소'였다는 이야기다.

철두철미하게 이성적인 이 작가는 정열적이고 야수적인 화풍을 선보인 이중섭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잠시 생각하더니 김종학이 입을 열었다. "이중섭 선생은 은지(銀紙) 위에 철필(鐵筆)로 라인 드로잉을 했지요. 이중섭의 은지화는 선과 면이라는 회화적 요소만 남아있는 단순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번에 제가 선보인 스틸 드로잉 작품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화풍을 떠나서도 저는 화가 이중섭을 높이 평가합니다. 전쟁통에도 붓을 꺾지 않은 창작에 대한 욕구, 그리고자 하는 본능적인 충동…. 그가 후배 예술가들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은 그러한 예술가상(像)이죠." (02) 724-6322, 6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