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언제나 너그러운 '풀솜할미<외할머니 별칭>'이고 싶다

"나 역시 자식 키울 때는 뭐든 뛰어나길 바라는 엄마였다

성에 차지 않아 속도 끓었다 이젠 손주들이 건강하기 바랄뿐

할머니도 날 예뻐했다

엄마가 핀잔 준 큰 발까지 아빠 닮았다며 칭찬했다

못생긴 내 발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 따스한 눈빛이 떠오른다"

별안간 조용하다. 적막하던 집안에 활기를 불어넣던 외손주들이 안방 문을 꼭 닫고 무슨 모의를 하나 보다. 살그머니 들여다봤더니 손자는 침대에 엎드려 글씨를 쓰는 중이고, 머리를 서로 맞댄 손녀 셋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얼마 후 방문이 열리더니 종이나팔이 울리고, 다섯 살배기 막내 손녀가 어깨에 이불을 걸치고 머리엔 왕관을 쓰고 나타났다. 미스코리아처럼 두 손으로 종이막대를 비스듬히 잡고 거실을 천천히 돈다. 일곱 살인 둘째 손녀는 고양이 분장을 하고 익살 부리며 그 뒤를 따른다. 열 살짜리 맏손녀가 무성영화의 변사인 양 읊어 나가는 내용은 신라시대 선덕여왕이 등극하는 장면이다. 여덟 살 난 손자가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표현한 글이 제법이다. 얼마 전 끝난 TV 드라마를 두 딸이 낳은 고만고만한 애들이 제각각 역할을 맡아 패러디한 작품을 보고 어른들은 배꼽을 쥐고 한바탕 웃었다.

이런 걸작(?)을 연출한 맏손녀는 막내딸의 소생이다. 막내딸은 꼴찌로 태어난 설움을 보상하려는 듯이, 나를 할머니로 승격시키는 갓난애를 제일 먼저 안겨 줬다. 언제나 동생들을 잘 보살피는 맏손녀는 국화처럼 의젓하고, 하나뿐인 손자 녀석은 꿋꿋한 대나무처럼 믿음직스럽다. 둘째 손녀는 조그마한 체수 어디에 담대한 기질이 담겼는지 설중매(雪中梅) 같다. 공주를 자처하는 막내 손녀는 청초한 난초를 닮았다.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외손주들을 나름대로 사군자(四君子)에 비유해본다. 세상 밖으로 나가서도 올곧고 굳세기를 바라면서.

막내딸네에 갔을 때였다. 손녀가 일기장을 펴 놓고 다소곳이 눈을 내리깔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우리 예영이가 무얼 쓸까 하고 고민하는구나"라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엄마는 참. 쓰기 싫어 꾀부리는 건데." 딸의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하다. 여태껏 젖 빠는 시늉을 하던 어린 것이 공부한답시고 폼을 잡은 모양새가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해 보이기도 하건만, 제 어미는 그게 아닌가 보다. 애를 공부시키느라 뭐가 속이 상했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린 딸에게서 내 젊은 날이 언뜻 비쳤다.

나 역시 자식들을 키울 때는 뭐든 뛰어나길 바라던 어미였다. 남들이 극성스럽다고 여길 정도로 뒷바라지하면서 신바람이 나기도 했었고, 때로는 성에 차지 않아 속을 끓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손주들이 그저 건강하고 원만하게 자라기만 바랄 뿐이다. 이것이 어머니와 할머니의 다른 점일까.

우리 할머니도 나를 참으로 예뻐하셨다. 그런 할머니가 좋아서 어릴 적에는 할머니 댁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하루는 대청마루에 앉아 맨발로 서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할머니께서 "발도 네 아버지 닮아 예쁘구나" 하시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내 버선을 지으면서 여자애 발이 너무 넓다고 핀잔을 했었다. 그래서 그때는 할머니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깨달은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였다. 가끔 내 못생긴 발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날 보았던 할머니의 따스한 눈빛이 떠오른다.

"친손자는 걸리고, 외손자는 업고 간다"는 말이 있다. 외손자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각별했으면 그런 말이 전해졌을까. 아마도 그것은 시집보내고 자주 볼 수 없는 딸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그렇게 표현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아직 친손자가 없어 그 차이를 모른다. 또 외할머니를 뵙지 못해 그 사랑을 잘 모르지만, 친할머니를 잣대 삼아 외할머니의 사랑을 가늠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데워진다.

외할머니의 곁말이 '풀솜할머니'이다. 풀솜은 허드레 누에고치로 만든 솜이다. 얼마나 따뜻하고 얼마나 보드라울까. 무조건 응석을 받아주고 감싸주는 외할머니를 더 친근하게 부르는 우리말이다.

거실에서 연극을 끝낸 아이들이 이번에는 야단법석이다. 제 어미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의가 두터운 애들은 싸우지 않고 잘도 논다. 거실 소파의 방석이 징검다리가 되고 썰매도 된다. '징검방석'을 펄쩍펄쩍 뛰는가 하면 '방석썰매'를 타고 빙빙 돈다. 난장판이 따로 없다. "그래, 너희들 집에서 할 수 없는 장난이 할미 집에선 다 통하니까 실컷 놀아라." 속말을 하는 내 얼굴에 절로 웃음이 번진다. 나는 외손주들에게 너그러운 할머니이고 싶다. 힘겨운 세상에서 고달프면 언제든 달려와 안기고 싶은 풀솜할미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