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12兆 잡아라… 금융가 뜨거운 연말

"퇴직연금을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3개월 이후에 전 직원에게 신용대출 금리 인하 혜택을 제공하겠습니다."(A외국계 은행)

"저희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일대일 자산운용 상담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와 별도로 분기마다 설명회를 갖고 퇴직연금 운용 현황을 브리핑해 드리겠습니다."(B증권사)

지난 10일 서울의 한 외국계 기업에서 열린 퇴직연금 사업자 선정 프레젠테이션(PT) 현장. 6개 금융회사에서 나온 퇴직연금 영업맨들이 자사 퇴직연금 서비스의 장점을 알리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반면 기업 임원과 직원은 팔짱을 끼고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댄 채 브리핑을 듣고 채점표에 점수를 매겼다.

연말을 앞두고 금융가에서 퇴직연금 기업 고객을 유치하기 위한 사투(死鬪)가 벌어지고 있다. 퇴직연금이란 기업이 사내에 적립하던 퇴직금을 금융회사에 위탁·관리하는 것으로 근로자가 퇴직하면 연금이나 퇴직금으로 받아 쓸 수 있다. 2005년 처음 도입됐다.

◇퇴직연금 시장, 연말 대전(大戰)

최근 퇴직연금 시장이 뜨거워진 것은 퇴직금 관련 기업 세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사내에 예치해둔 퇴직금은 25%만 손비(損費)로 인정되고, 나머지 퇴직적립금에 대해선 법인세를 내야 한다. 반면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기업이 퇴직금 관련 법인세를 한 푼도 물지 않아도 된다. 또 퇴직금을 적립해 둔 기존 상품(퇴직보험·신탁)이 올해부터 판매되지 않고 있어서, 직원 퇴직금 운용을 외부에 맡기려면 어차피 '퇴직연금' 상품으로 갈아타야 한다. 이런 배경 때문에 현재 한진그룹·SK그룹·기아자동차 등 굴지의 대기업이 속속 퇴직연금 가입을 앞두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현재 300인 이상 대기업 2483곳의 퇴직연금 가입률은 57%(1428곳) 수준인데 연말까지 70%로 확대되고, 그 결과 금융회사의 퇴직연금 적립금이 현재 38조원에서 연말까지 50조로 급성장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금융회사는 을(乙), 기업은 갑(甲)

현재 퇴직연금 시장에선 은행·증권·보험 등 57개 사업자가 영업 경쟁을 펼치고 있다.

종업원 300인 이상 대기업들은 보통 입찰에 부쳐 퇴직연금 사업자를 선정한다. 기업들은 금융회사로부터 제안서를 받은 뒤 1차로 10~20개를 추려내고,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3~4곳, 많게는 10곳 복수 사업자를 선정해 운용할 퇴직금을 배분한다.

금융회사 입장에선 대기업의 퇴직연금은 거액의 자금을 유치할 수 있는 드문 기회라서 악착같이 달려든다. 금융회사 퇴직연금 담당 직원들은 오전에 곧장 공략해야 할 기업으로 출근, 하루 평균 4~5곳의 기업체를 방문해 설명회를 갖는다. 주말 근무도 잦다. 삼성생명 김기운 과장은 "한국공항공사 설명회를 다닐 때 지방공항 간에 운행하는 비행기가 없어 시외버스와 택시를 갈아타고 전국 14개 지방 공항을 누볐다"고 말했다.

ING생명 정주성 부장은 "1000억원 정도의 퇴직연금을 맡기는 대기업에서 100억 이상 배분받으면 '대박', 100억 미만은 '보통', 수십억 수준은 '용 썼다'는 정도의 자체 평가를 내린다"고 말했다.

◇금리 경쟁 어려워 시장 혼탁

과거 금융회사들은 경쟁사보다 높은 확정금리(은행과 보험사 기준)를 앞세워 퇴직연금 유치경쟁을 펼쳐 왔는데, 지난 7월 금융감독원에서 '금리 경쟁 자제'를 경고한 이후 '서비스 경쟁'에 더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금융회사들은 "퇴직연금 가입자에게 3개월 이내에는 대출해주지 말라"는 금감원의 가이드라인을 피하기 위해 "3개월 후 신용대출금리를 내려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편법 영업이 판을 치고 있다. B금융회사 관계자는 "최근 한 외국계 은행이 이런 방식으로 영업해 직원 200명 수준의 기업 퇴직금의 90%를 독식해 다른 금융회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고 말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퇴직연금을 둘러싼 경쟁이 지나쳐 시장 질서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면서 "내년 1월까지 퇴직연금 영업 규제안을 마련해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