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안정 고려한 마일드한 경기부양책 강구할 듯
최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의 입에서는 “걱정이다”, “어렵다”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유럽재정위기의 풍랑이 유럽 세번째 경제대국 이탈리아로 몰아닥치는 등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국내 경기에도 둔화 압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의 경기 흐름을 보여주는 경기동행지수와 선행지수는 지난 9월을 기점으로 동반하락세로 전환했다. 경기둔화가 본격화할 가능성을 예고한 것이다. 민간 경제연구소들은 올해와 내년 우리 경제가 잠재성장률을 다소 밑도는 3% 성장에 그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경기둔화 우려가 커짐에 따라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뒀던 정부 정책 기조에도 변화가 엿보인다. 정부는 연말까지 미집행된 재정 50조원을 풀어서 예산불용액을 최소화하기로 했다. 물가안정을 위해 억제했던 재정지출을 다시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물가 보다는 경기에 정부의 관심이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단적인 사례다.
◆ ‘물가안정’에서 ‘경제안정·체질개선’으로 선회하는 정부
정부는 지난 6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을 발표하면서 “물가안정에 최우선 정책 순위를 두겠다”고 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정부는 이런 입장을 고수했다. 박재완 장관도 지난달 31일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정책의 우선 순위는 여전히 인플레 기대심리를 진정시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이달들어 급선회하기 시작했다. ‘물가안정’이라는 말이 사라진 대신 ‘경제체질 개선’과 ‘경제안정’이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달들어 이탈리아 국채금리가 급등하는 등 재정위기 여파가 전방위로 확산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정부 정책 스탠스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유럽발(發) 재정위기로 글로벌 경제가 위축될 경우 국내 경기도 둔화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우려가 반영된 결과다.
주목할 부분은 ‘경제체질 개선’과 ‘경제안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경기 회복에 방점을 찍더라도, 부동산 경기 활성화 같은 인위적인 부양정책을 쓰지는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재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경기가 급격하게 위축되면 주로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서민들의 경제적 기반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면서 “경제를 안정시키겠다는 건 이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면서도, 경제 체질에 부담을 줄 수 있는 과도한 부양책을 펼치지도 않겠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 “인위적인 부양정책은 사용하지 않을 듯”
이런 언급은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내년 거시정책 흐름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의 ‘확장적 거시정책’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의미한다. 위기 극복을 위해 사용했던 공격적인 금리인하와 재정지출 확대 등이 동원되는 대규모 부양정책이 사용될 가능성이 낮다는 얘기다.
경기 하강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지만, 우리 경제가 급격한 침체국면에 접어들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부양정책을 쓸 경우 물가상승과 부동산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해 경제체질이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재정부 한 관계자는 “경기 둔화 압력이 커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경기 순환에 따른 하강국면으로 접어드는 수준으로 판단된다”면서 “현재는 최대한 정책 수단을 아껴놓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물가상승 압력이 여전히 높다는 점도 정부로서는 부담이다. 전문가들은 내년 물가상승률이 3%중반으로 낮아지더라도, 체감물가는 여전히 높을 것으로 전망한다. 올해 4%에 이르렀던 물가상승률의 기저(旗低)효과를 감안할 때 3%의 물가상승률은 실질 가처분 소득 감소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유동성을 증가시키고, 물가상승세를 부채질 할 확장정책을 펼치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외국계 은행 소속 이코노미스트는 “내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물가를 무시하는 정책을 쓰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경기 부양을 위해 쓸 수단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 재정 조기집행·환율 안정 통한 소규모 부양효과 노릴 듯
경기순환에 따른 하강 국면에서 재정정책의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정부로서는 고민이다. 김성태 KDI연구위원은 “2000년 이후 재정정책의 효과를 검토한 결과, 재정확대정책은 금융위기 같은 급격한 경기 위축기에는 경기를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었으나, 경기순환에 따른 하강국면에서 큰 영향이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정부는 ‘재정조기집행’ 카드를 다시 꺼냈다. 박재완 장관은 “내년 상반기가 하반기보다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재정을 조기 집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정조기집행은 시중에 풀리는 유동성 총량을 일정 수준에 묶어두면서도 특정한 시기의 경기를 활성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다만 박 장관은 “물가를 고려해 스피드를 조절할 필요는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경기조절수단으로서 환율의 중요성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올해 정부는 ‘환율 급변동을 억제한다’는 이유로 고비 때마다 시장 안정책을 사용했다. 물가 부담이 커질 때는 환율 급등을 억제해 수입물가 상승 압력을 낮췄고, 환율 절상폭이 비정상적으로 커질 때에는 과도한 외화유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써왔다. 그 결과 환율은 연 중 1050원에서 1200원 사이에서 움직임이 제한됐다.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Fitch)는 이에 대해 “한국의 유연한 환율제도가 경제에 상당한 버퍼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높게 평가했다.
민간 전문가들은 본격적인 경기둔화를 맞이하는 정부의 대응이 3년전(2009년)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을 것으로 본다. 재정과 통화 등 정책 수단을 쓰는 데 매우 조심스러워 할 것이라는 얘기다. 한 민간 이코노미스트는 “물가와 가계부채, 가계소득 등 여러가지 거시경제 흐름이 혼재된 시그널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경기가 순환기적인 둔화양상을 보인다고 해서 적극적인 부양책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며 “재정과 환율 등을 통해 부분적인 부양 효과를 거두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