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할머니 손때 묻은 항아리
입력 : 2011.11.15 23:29
아침 거르고 간 내가 배곯을까 도시락 들고 학교 오시던 할머니
치매로 쓰러져 손녀도 못 알아봐 서너달 만에 갑작스레 이별
할머니가 쓰던 항아리 보면 손녀 향한 애틋한 사랑 떠올라
우리 집 아파트 베란다엔 삼십 년이 훌쩍 넘은 커다란 항아리가 하나 있다. 할머니 손때가 묻은 항아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묘하게 윤기가 흐른다. 나는 여덟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난 할머니의 유일한 손주였다. 그래서인지 양은대야, 반짇고리 함, 항아리처럼 할머니가 쓰시던 소소한 물건을 여러 차례 이사를 다니면서도 버릴 수가 없었다.
결혼 후 신접살림하던 전셋집에 살 때는 내 키에 버금가는 항아리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주인집 옥상에 올려놓았다. 장 담글 줄도 모르는 내게 그 항아리는 사실 무용지물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새댁이 필요하지 않으면 내가 쓰겠다"며 군침을 흘렸지만 나는 쓰지도 않을 거면서 고집스럽게 챙겼다. 아파트를 장만해서 이사 올 때도 남편은 "쓸모도 없는데 짐만 된다"며 버렸으면 했지만 나는 "두고 보면 꼭 쓸 일이 있을 것"이라며 베란다 안쪽에 기어이 옮겨 놓았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서울 장위동 골목안 집들은 서로 허물없이 드나들었다.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 먹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함경도 출신인 할머니 손맛은 일품이어서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되곤 했다. 마음씨만큼이나 손도 컸던 할머니는 비가 오면 부침개, 눈 올 때는 수제비나 칼국수에 가끔 별식으로 함경도 아바이순대와 가자미식해를 내놓아 인기 최고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계절마다 소박하게 먹고 놀던 기억이 새콤하고 알싸한 가자미식해 냄새처럼 피어오른다.
할머니는 예순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높은 장독대를 올라다니며 여러 개의 항아리 뚜껑을 열어놓고 번갈아 가며 햇볕을 쪼이고 환기시켜주는 일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잘 담근 장일수록 손길 분주하게 관리해 주어야 식구들 입맛에 맞출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시집가면 너도 꼭 그래야 헌다. 알겠음둥." 머리에 비녀를 꽂은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며 당부하셨다.
결혼 후 신접살림하던 전셋집에 살 때는 내 키에 버금가는 항아리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주인집 옥상에 올려놓았다. 장 담글 줄도 모르는 내게 그 항아리는 사실 무용지물이었다. 주인집 아주머니는 "새댁이 필요하지 않으면 내가 쓰겠다"며 군침을 흘렸지만 나는 쓰지도 않을 거면서 고집스럽게 챙겼다. 아파트를 장만해서 이사 올 때도 남편은 "쓸모도 없는데 짐만 된다"며 버렸으면 했지만 나는 "두고 보면 꼭 쓸 일이 있을 것"이라며 베란다 안쪽에 기어이 옮겨 놓았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서울 장위동 골목안 집들은 서로 허물없이 드나들었다.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 먹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함경도 출신인 할머니 손맛은 일품이어서 우리 집은 동네 사랑방이 되곤 했다. 마음씨만큼이나 손도 컸던 할머니는 비가 오면 부침개, 눈 올 때는 수제비나 칼국수에 가끔 별식으로 함경도 아바이순대와 가자미식해를 내놓아 인기 최고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계절마다 소박하게 먹고 놀던 기억이 새콤하고 알싸한 가자미식해 냄새처럼 피어오른다.
할머니는 예순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높은 장독대를 올라다니며 여러 개의 항아리 뚜껑을 열어놓고 번갈아 가며 햇볕을 쪼이고 환기시켜주는 일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잘 담근 장일수록 손길 분주하게 관리해 주어야 식구들 입맛에 맞출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시집가면 너도 꼭 그래야 헌다. 알겠음둥." 머리에 비녀를 꽂은 할머니는 인자하게 웃으며 당부하셨다.
늦잠꾸러기였던 나는 아침밥은커녕 도시락도 챙기지 못한 채 허겁지겁 학교 가기에 바빴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도시락 두 개를 챙겨서 학교로 오셨다. 내가 "창피하니까 오지 말라"고 앙탈을 부려도, 담임선생님까지 나서서 "스스로 알아서 하게 그만 두시죠"라며 만류해도 아랑곳없었다. "할머니, 자꾸 학교에 도시락 가지고 오면 나 학교 안 갈 거야." "없어서 못 먹는 애들도 많다. 복에 겨워 말고 배 터지게 먹고 쑥쑥 커서 좋은 데 시집가서 이 할미 호강시켜줍세."
동네 아주머니 중에는 손녀딸에게 부엌일을 안 시킨다며 참견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시집가면 지겹게 할 궂은 일들을 왜 서둘러 시키는가. 때 되면 지가 다 알아서 허고, 닥치면 어련히 하게끔 되는 일인 법"이라며 단호하게 받아쳤다. 다행히 나는 지금까지 큰 일감에 휘둘려보거나 어떤 일이든 할 줄 몰라서 애를 먹지는 않았다. 할머니 치맛자락만 잡고 다닌 것 같았지만 어깨너머로 본 것만 해도 꽤 많았으니 어설프게나마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어느 날 부엌에서 갑자기 쓰러지셨을 때만 해도 나이 드신 분들이 으레 한 번씩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눈앞의 사람은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치매였다. 당시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세 살배기 아이로 변해버린 할머니가 너무 낯설었다. 남달리 총기가 뛰어나고 사리분별이 분명했던 할머니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당신 속옷을 뒤로 숨기고, "넌 이런 것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또 정신을 놓으면 당신이 손수 키운 손주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가끔 할머니는 눈에 초점 하나 없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도 살며시 내 손을 잡아당겨 당신의 가슴에 얹고 토닥였다. 그럴 때면 눈빛을 반짝이며 내게 당부하시는 것 같았다. "뭘 하든, 어디에 있든 스스로 존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할머니는 쓰러지신 지 서너 달 후에 세상을 뜨셨다. 문병 온 친구를 배웅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주무시듯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계셨다. 이렇다 할 유언이나 애달픈 이별연습을 할 기회도 없이 갑작스러운 임종이었다. 코흘리개 손녀를 걷어 사람 구실 하게 키운 공덕을 보답할 기회도 없이 아쉬운 이별이었다.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할머니가 남긴 항아리를 볼 때마다 당신이 보여 준 손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 목이 멘다.
동네 아주머니 중에는 손녀딸에게 부엌일을 안 시킨다며 참견하는 이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시집가면 지겹게 할 궂은 일들을 왜 서둘러 시키는가. 때 되면 지가 다 알아서 허고, 닥치면 어련히 하게끔 되는 일인 법"이라며 단호하게 받아쳤다. 다행히 나는 지금까지 큰 일감에 휘둘려보거나 어떤 일이든 할 줄 몰라서 애를 먹지는 않았다. 할머니 치맛자락만 잡고 다닌 것 같았지만 어깨너머로 본 것만 해도 꽤 많았으니 어설프게나마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어느 날 부엌에서 갑자기 쓰러지셨을 때만 해도 나이 드신 분들이 으레 한 번씩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눈앞의 사람은 물론,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치매였다. 당시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세 살배기 아이로 변해버린 할머니가 너무 낯설었다. 남달리 총기가 뛰어나고 사리분별이 분명했던 할머니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가끔 정신이 돌아오면 당신 속옷을 뒤로 숨기고, "넌 이런 것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또 정신을 놓으면 당신이 손수 키운 손주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가끔 할머니는 눈에 초점 하나 없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도 살며시 내 손을 잡아당겨 당신의 가슴에 얹고 토닥였다. 그럴 때면 눈빛을 반짝이며 내게 당부하시는 것 같았다. "뭘 하든, 어디에 있든 스스로 존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할머니는 쓰러지신 지 서너 달 후에 세상을 뜨셨다. 문병 온 친구를 배웅하고 병실로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주무시듯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계셨다. 이렇다 할 유언이나 애달픈 이별연습을 할 기회도 없이 갑작스러운 임종이었다. 코흘리개 손녀를 걷어 사람 구실 하게 키운 공덕을 보답할 기회도 없이 아쉬운 이별이었다.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할머니가 남긴 항아리를 볼 때마다 당신이 보여 준 손녀에 대한 애틋한 사랑에 목이 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