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국인이다] "고생 많이 했지" 98세 할머니의 주름이 말을 했다

"나는 한국말을 여기서 배웠슴이다. 삼형제 큰 오래비하고 작은동생하고 저입니다. 나만 살아있고 다들 세상 도라가슴이다. 저는 딸하고 주 은혜(로) 잘 살구있슴이다. 내 아버지가 내 어마가 세상을 떠나서 아이들 일어슴이다. 나를 (여덟살 때) 아주머니가 시집보내줄 거라고 데려갔슴이다. 나는 시집간 뒤에 고생만 하고 내 남편하고 시아버지하고 가시밭에 일하러 가는데 새벽에 나까지 데려가서 일을 헤슴이다. 고생을 만이 헤슴이다. 너무 부끄러워서 그만 끊슴이다. 너무 고생을 너무 헤서. 아멘." 전날 밤 손수 쓴 것이라 했다.

단추구멍처럼 졸아든 작은 눈에 언뜻 물기가 비치는가 싶더니 다시 서툰 한국말이 새어 나왔다. "고생 참 많이 했어요…."

"고생은 말도 못해요."

98세 할머니의 뇌리에 남은 '모국어'의 기억은 이 세 단어뿐인 걸까. 이야기 도중에도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할머니의 이름은 카르멜라 권 장. '권'과 '장'은 스페인식으로 각각 한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姓)을 딴 것이다.

할머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1905년 5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뙤약볕 아래 멕시코 유카탄에 첫발을 디뎠다. 그 태양 아래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자식을 기르다 세상을 떴다. 이른바 '에네켄', 밧줄 재료로 쓰이는 선인장의 일종인 에네켄 농장으로 이민 온 노동자들이었다. 카르멜라 할머니는 그 2세대. 근 1세기를 살아온 그는 에네켄 2세대 생존자 중 최고령자다. 그녀가 첫 울음을 터뜨린 곳 역시 메리다시(市)의 에네켄 농장이었다. 하지만 키 150㎝ 남짓한 작은 체구의 그녀 말씨에선 이북 억양이 희미하게 묻어났다. 그의 허술한 한국어는 어릴 적 그곳 한글학교에서 배운 것이다.

지난달 24일 티후아나 한글학교에서 만난 할머니는 대뜸 꼬깃꼬깃 접은 A4용지 한 장을 펴들었다. 삐뚤 빼뚤 한글이 세로쓰기로 빼곡했다.

멕시코에 정착한 한인 후손은 현재 약 5000가구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상당수는 주로 티후아나와 멕시코시티에 거주한다. 이곳에서는 각각의 한인회를 중심으로 한글학교 등을 운영하면서 꼬레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세현은…

한국 최고의 인물사진가로 꼽힌다. 패션, 광고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는 쟁쟁한 스타들과 입양 대기 중인 아이들을 함께 찍는 '천사들의 편지', 장애인올림픽 전속 사진작가 등 '자선 사진'으로도 잘 알려졌다.

요즘 관심사는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민족 그리고 한국인들. 지난 8년간 중국 전역을 돌며 소수민족 사진을 찍어 전시회를 했고, 이번에는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을 렌즈로 잡았다. "우리도 다른 나라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그걸 담고 싶다"는 게 그가 중남미로 향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