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아리랑

"한국에 꼭 좀 가봐야겠어요."

여덟 살 꼬마의 말이 꽤 야무졌다. 더구나 태극기 바탕에 '대한민국!'이 찍힌 붉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산데르 모랄레스 임. 쿠바 이민 한인 4세다. 아이에게는 독립운동가, 혁명가, 한인 지도자의 피가 흐른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쿠바혁명에 참여했던 임은조(헤로니모 임), 임은조의 아버지가 이민 1세 임천택이다.

지난달 30일 쿠바 아바나 근교에 사는 임은조의 부인 크리스티나 장 김(83) 할머니를 찾아간 길이었다. 소년은 어머니 파트리시아 임 장(43)보다 먼저 쪼르르 달려나와 인사했다. 얼굴은 '혼혈'이 뚜렷한데 깍듯한 '배꼽 인사'가 완전 한국식이다. 어른들 얘기가 끝나자 아이는 그간 별러온 듯 스페인어로 자문자답을 쏟아냈다. "얼마 전에 한국과 북한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왜 지금까지 한국은 하나라고 생각했을까. 너무 궁금해서 할머니한테 물었어요. 한반도에 전쟁이 나서 분단됐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말로만 들어서는 안 되니까 내가 꼭 한번 가보면 좋겠어요. 나는 쿠바인이니까 꼭 돌아올 거예요. 그곳 동물들이랑 꽃들이랑 다 보고 싶어요.나는 쿠바인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좋아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한국인이 오면 뭐든 다 주고 싶어져요. 우리랑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내가 한국말도 배울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똘똘한 아이의 외증조부가 한국을 떠난 것은 지금 손주의 나이보다 훨씬 더 어린 두 살 때였다. 홀어머니 품에 안겨 멕시코로 이민을 왔다. 18세에는 다시 살 길을 찾아 쿠바로 이주했다.

젊은 나이에도 리더십이 출중했다. 한인협회를 세웠고 1923년 쿠바 한인 독립선언 시위를 주도했다. 김구 선생 '백범일지'에도 '쿠바에서는 임천택 등 제씨가 임시정부를 후원…'이라고 나온다. 1997년 8월 적성국(쿠바) 국적으로는 처음으로 건국장 애국장을 받고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막내딸 이르마(69) 할머니는 "아버지는 6·25가 터지자 가슴 아파하다가 1988년 돌아가셨다"고 했다. 의협심은 부전자전이었다. 맏아들 헤로니모(임은조·2008년 사망)는 카스트로와 같은 아바나법대 출신으로 함께 쿠바혁명을 이끌었다. 1993년 식료품공업부 차관보로 퇴직하고 동아바나 지역 인민위원장(차관급)까지 지냈다. 그래도 그의 인생 후반은 결국 한인회에 썼다. 택시를 몰고 쿠바 전역을 돌며 한인 명단을 만들고 협회를 세웠다. 그의 아내 크리스티나 장 김은 "한인의 뿌리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내 사랑하는 부모님, 당신들 사랑 속에서 내가 내내 빛나는 길로 다닐 수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 헤로니모' 청년 임은조가 21세 때 찍은 사진 뒷장에 흘려 쓴 사부모곡(思父母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