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괴물들, 하이닉스와 전쟁땐 피 흘릴 각오하라"

"그동안 특허 괴물(Patent Troll ·키워드)들은 한국 기업을 쉬운 먹잇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1년을 끌었던 이번 반독점 소송의 승리는 특허 괴물이 한국 기업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려면 큰 피를 흘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이닉스반도체 특허 업무를 총괄하는 최민구 전무(대외협력실장)는 미국 특허 기술 업체 램버스와 벌인 반독점 소송에서 승리한 소감을 묻자 "미국 법원 판결이 나온 17일 램버스 주가가 18.04달러에서 7.11달러까지 폭락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램버스는 '램버스D램'(RD램)이란 반도체 기술을 개발한 업체로, 직접 제품을 생산하지 않고 제조업체로부터 받는 기술 특허료를 수익으로 삼는 회사다. 최 전무는 행정고시 28기 출신으로 미국 워싱턴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2007년 전략기획실장으로 하이닉스에 합류했다.

램버스는 2000년 8월 하이닉스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며 미국 법원에 고소했다. 2004년 이후에는 '하이닉스·마이크론·인피니온·지멘스·삼성전자 같은 D램 업체들이 담합해 우리가 개발한 RD램 기술을 시장에서 퇴출했다'며 반독점 소송을 제기하고 39억달러를 요구했다. 다른 업체는 대부분 램버스와 라이선스(특허 사용 계약)를 체결해 반독점 소송 대상에서 빠져나갔지만 하이닉스는 고집스럽게 소송을 계속해 17일 승소 판결을 받았다.

"특허 괴물들은 그동안 한국 기업을 '쉬운 먹잇감'이라고 말해왔습니다. 특허료를 요구하면 많이, 그것도 빨리 준다는 것이죠. 램버스와 11년간 소송을 했습니다. 소송 비용도 수백억원이 들었죠. 시간과 돈을 생각하면 타협이 더 편할 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대부분 업체는 타협을 택한다고 그는 말한다. "39억달러를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2억~3억달러면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많다고 판단해 소송을 했습니다."

"한 업체가 돈을 주면 특허 괴물은 그 돈을 종자돈 삼아 다른 업체를 공격합니다. 또 먼저 타협하면 돈이 적게 들기 때문에 타협하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특허 괴물은 예를 들어 특허료로 매출의 1%를 받는다는 계약을 할 때 이후 다른 업체와 계약할 때 1% 이상을 받는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는다. 최 전무는 "하이닉스와 램버스의 11년 소송은 특허 업계에선 유명한 이야기"라며 "향후 다른 특허 괴물이 하이닉스를 상대로 함부로 소송을 걸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승소 비결을 '용병술'이라고 말했다. "2001년 8월 처음 특허 소송을 맡은 변호사 이름이 캔 리슬리입니다. 이번 반독점 소송을 승리로 이끈 사람이 바로 리슬리입니다." 하이닉스가 한 사람을 고집한 이유는 우선 반도체 특허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 "일단 변호사가 복잡한 기술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배심원을 설득할 수 있죠." 미국 재판의 승패는 배심원에게 달렸다. "일반 시민 가운데 무작위로 선택한 배심원을 전문 용어가 아닌 평이한 말로 설명하려면 오랜 경험과 폭넓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지난 17일 끝난 반독점 소송에서 배심원 12명 가운데 9명이 하이닉스 편을 들었다. 최 전무는 "미국 법조계에서도 판결이 의외라고 말한다"고 말했다. 일반 시민에게 이런 어려운 주제에 대해 설명한 다음 판단을 내리게 하면 이렇게 일방적인 결정이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송을 맡은 법무법인 OMM은 유명한 업체는 아니지만 11년째 우리와 손발을 맞춘 업체입니다. 명성이 아니라 의지와 실력을 보고 선택했고, 그다음엔 믿고 있습니다."

하이닉스 법무팀은 화려하지 않다. 최 전무는 오히려 "그래서 회사 법무팀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팀원 60명 가운데 변호사 자격을 가진 사람은 특허라이선스팀에 한 명뿐입니다. 회사서 유학 비용을 대 미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죠." 하이닉스는 사내 엔지니어와 법학 전공자를 교육해 특허 업무를 맡겼다. 화려한 간판을 가진 직원은 드물지만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 회사가 흔들리면 다른 곳으로 쉽게 옮길 수 있는 유명 변호사들과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최 전무는 "내부 인력이 특허 기술을 정확히 분석해 상대방 주장을 흔들 논리를 만들고 외부 전문가를 제대로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략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면 소송 비용이 지금보다 배 이상 더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닉스와 램버스의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램버스가 이번 판결 결과에 불복하고 항소하면 판결에 적용한 법리에 문제가 없었는가를 다시 가려야 한다. 최 전무는 "담합 유무에 대한 판단은 끝났지만 판단에 법적인 문제가 있었는지를 따져 보는 것"이라며 "결과가 크게 달라질 일은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진행 중인 특허 협상이 4건 있어요. 앞으로도 특허 괴물과 계속 싸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죠. 줄 것은 주겠지만 달라는 대로 다 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 특허 괴물(Patent Troll)

상품의 제조나 판매를 하지 않으면서 보유한 특허를 무기로 제조업체로부터 받는 특허 사용료를 주 수익으로 삼는 특허 전문 관리 회사(Non-Practicing Entity·NPE)를 지칭하는 말. 유럽·미국의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이들이 가졌던 특허들이 ‘특허 괴물’에게 흘러들어 갔고, 특허 괴물은 이를 무기로 신흥 제조 강국으로 부상한 아시아의 제조업체를 공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