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임나(임나일본부)가 이 근처…' 노래로 日帝 침략 미화

'메이지 천황 존엄한 위세 널리 퍼져있고/ 그 자비로운 바람에 찬란한 문화의 나라 조선도 복종하고/ 아무 항거 없으니 경사로다'.

한일 강제 병합 직후인 1911년(명치 44년) 일제가 이런 내용의 노래책을 배포했다. 가사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원대한 계략/ 사이고 다카모리옹의 선견지명/ 새로운 일본의 신판도로/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났네'라는 대목도 있었다. 임진왜란과 정한론(征韓論)을 들어 조선 병합을 합리화·미화하는 내용이다.

일제가 조선 병합 직후 한반도 침략을 미화하는 내용을 자국민에게 창가 형식으로 보급하기 위해 만든 소책자 '지리역사조선창가'가 20일 처음 공개됐다. 1911년 2월 일본 후잔보(富山房) 출판사가 낸 이 노래책은 악보와 47절의 가사를 담았다. 제목은 '지리역사'이지만 내용은 조선 침략 미화 일색이다.

이 창가집의 작사가 이시하라 와사부로(石原和三郞·1865~1922)는 고향인 일본 군마현에서 '동요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 작곡가 다무라 도라조오(田村虎藏·1873~1943) 역시 동경고등사범학교·동경음악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한 일본 음악교육 선구자로 꼽힌다. 당대의 대표적 작사·작곡가를 동원해 만든 이 책자는 1911년 2월 첫 출간 후 11월 재판을 찍었다. 당시 일제가 대대적으로 조선 병합을 홍보했음을 알 수 있다.

책에 실린 가사는 부산, 목포부터 경성, 개성, 평양을 거쳐 압록강, 백두산까지 조선의 지리 정보에다 일본의 역대 조선 침략 사건과 주요 인물들을 결부했다.

이정면 유타대 교수의 번역에 따르면, 가사는 '부산항에 와 보니 가옥 수는 대강 1만호' '밀양 일대는 미곡 산지' '대구역에서 볼 만한 것은 봄(2월) 가을(10월)에 열리는 큰 시장' '수원 북쪽에 영등포가 있고' 식으로 조선 팔도의 주요 인문 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

서울에 대해서는 '시가를 둘러싼 성벽에/ 기와 높이 쌓은 여덟 개 문/ 과연 자랑할 만큼 훌륭한 이조 오백년/ 수도였음을 보여 준 사적 찬란하기만 하다'(17절)에 이어 '유서 깊은 궁전과 수많은 명승지 그리고 고적/ 왜성대에서 내려다보면/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18절)며 두 절에 걸쳐 소개했다.

또 동래부를 '고요하며 풍류스럽고 우아한 곳'이라 묘사했는가 하면 '낙동강 연안에 흰 옷 입고 있는 사람들 정답구나' '인천항에 다다르니 나날이 발달하는 그 모습'이라고 적어 조선 땅에 대한 일본인들의 호감을 유발하려 했다.

하지만 주 목적은 일본의 조선 침략 정당화였다. '옛날의 임나가 이 근처라오'(임나일본부설) '을밀대 서쪽 언덕/ 개국의 발자국을 더듬으며/ 기자의 영묘를 찾아 참배하니/ 까치가 울고 해 저물어 가네'(기자조선설) 등 고대사와 관련해 외세의 조선 침략·지배 내용을 담은 신화와 학설들을 등장시켰다.

한반도에서 일본이 벌인 전쟁을 망라한 것도 특징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청일전쟁, 임오군란 등을 거론해 중국에 대한 대결 의식을 드러냈다. '이름도 고약한 안성도/ 이곳에서 전사한 마쓰자키 대위가 그리워지네'(청일전쟁) '벽제관 유적 찾으니/ 귀신을 무색케 했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명나라 대군을 섬멸해/ 용맹을 떨친 무명만이 남아있네'(임진왜란) '고봉산 봉우리는 높이 솟아 있고/ 가토 기요마사가 세운 공훈을 우러러보네'(임진왜란) '임진역 근처도 옛 전쟁터/ 지난날 일로전쟁 때/ 병참지로 쓰였다네'(러일전쟁) 등이다.

또 전투가 벌어졌던 곳을 열거함으로써 당시 일제가 만주와 중국 침략을 앞두고 전의(戰意)를 독려한 듯한 인상도 준다. 군산항을 두고 '옛 백제의 땅/ 천지천황 시대에/ 일본군이 나당군에 패해/ 백마강을 피로 붉게 물들인 곳'이라거나, 동해를 두고 '이 부근은 옛 신라의 땅/ 울릉도는 보이지 않아도/ 일본 해전의 용맹스러웠던 승리를 그려본다'고 썼다.

마지막 절은 '일본인은 예부터/ 충성심과 의리 그리고 정이 있다네/ 그 의리와 정 가지고/ 새 백성과 친하게 지내려네'로 맺었다.

구인모 연세대 교수는 "이런 자기 합리화 혹은 자기 기만의 수사가 음악과 결합해 감각적으로 내면화하면서 식민 지배가 유년 학습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정당화됐을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이 창가는 단순한 역사 지리 교과의 부교재를 넘어 이념 교재라 할 수 있다"고 평했다.

책자 각 면에는 조선의 주요 도시와 사적 실사 사진과 함께 임진왜란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 등 일본 장군과 정치인 초상화도 실렸다.

22×12㎝ 크기의 이 포켓판 책자는 모두 26쪽 분량으로 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가 일본 고서점에서 입수해 본지에 공개했다.

☞창가

개화기에 나온 신식 노래. 일제는 19세기 말부터 교과과정으로 편성해 정책적으로 활용했다. '지리역사조선창가'는 사장조 2/4박자 곡으로 부르기 쉬운 제창곡 형식이다. 노동은 중앙대 교수는 "일제는 조선과 만주를 식민지 전진기지로 만들려고 여러 창가집·엽서 등을 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