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눈빛 가지고 돌아온 女帝

"손가락 부상 이후 난생처음 옛날에 했던 연주를 되풀이해 들어봤어요. 예전엔 내 연주를 들으면 못마땅하고 소름이 끼쳐 다시 듣지 않았는데 이번엔 딴 사람 것처럼 편안하게 들렸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헤매는 게 인간이다. 완벽하게 하려고 망설이면서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낫다'…."

바이올린의 여제(女帝) 정경화(63)가 9년 만에 독주회를 연다. 다음 달 19일부터 26일까지 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대전 문화예술의전당, 춘천 문화예술회관,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도는 제법 긴 여정이다. 그에 앞서 다음 달 13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는 언니(정명화)·동생(정명훈)과 함께 어머니 고(故) 이원숙 여사를 추모하는 콘서트를 갖는다.

2005년 9월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키로프 오케스트라의 내한 때, 정경화는 오른쪽 검지를 다쳤다. 무통 주사를 맞고 손가락이 퉁퉁 부은 상태로 연주를 강행한 대가(代價)는 고약했다. 바이올린을 놓아야 했던 것.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언니(정명소), 친구 겸 프로듀서 크리스토퍼 레이번, 어머니를 차례로 잃었다. 아버지(고 정준채씨)·스승·매니저가 한꺼번에 세상을 떠난 1980년과 비슷했다. 21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정경화는 그간의 공백을 "죽음과 방황, 인내로 점철된 시간"이라고 압축했다.

그가 다시 바이올린을 쥘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주문'이 귓가를 때렸기 때문이다.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 때, 어머니는 제가 입을 빨간색 스커트를 한 땀씩 꿰맬 때마다 긴 기도를 하셨어요. 그러면서 '파이팅' 대신 '포지티브 씽킹(positive thinking·긍정적 생각)'을 외치셨지요."

그는 이번 독주회를 '헌정'으로 꾸민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 21번'은 작곡가가 모친을 잃은 직후 만든 곡이고,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어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곡이다. 아버지 생전 마지막으로 들려드린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3번'과, 레이번에게 바치는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도 넣었다.

지난 6월 그는 어머니의 유골을 묏자리가 있는 뉴욕 퀸스까지 품에 안고 갔다. 그러면서 "일평생 잡고 살아온 '완벽주의'를 벗어버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기교는 조금 무뎌졌을지 몰라도 몸과 영혼이 연결돼 있는 바이올린 색채를 보여드릴게요." 한때 '바이올린을 든 마녀'라고 불릴 만큼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여제의 눈가에선 삶을 관조하는 여유가 묻어났다.